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뜻이 있는 곳에 철길이 있다

입력 | 2018-12-05 03:00:00


북한에서 운행되고 있는 증기기관차. 북한은 전시 예비용으로 이런 증기기관차들을 보관해두고 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2016년 5월 북한 노동당 7차 대회 도중 평양 철도국장과 정치부장이 체포돼 처형됐다. 대회 기간에 음주 금지령을 어기고, 밤에 몰래 술을 마시고 숙소에서 주정한 것이 걸렸다. 다음 날 김정은이 회의장에서 이들을 거론하며 격노했고 두 사람은 대회장에서 직위 해제와 출당을 당한 뒤 체포됐다. 참가자들은 이들이 처형될 것임을 예감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아무리 북한이라고 해도 술주정으로 처형시키긴 어려우니, 이들은 반동으로 둔갑했다. 사형 판결문엔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증기기관차는 전쟁 때 한몫 단단히 하니 전시 예비용으로 잘 보관 관리하라고 하셨는데, 이자들은 언제 이런 고물을 다시 쓰겠는가 하면서 수십 대를 파철(고철)로 팔아먹었다”고 적시됐다고 한다. 2009년 처형된 김용삼 철도상도 전시 예비용 증기기관차들을 못 쓰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 사유였다.

이쯤 되면 요새 남쪽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장혁 북한 철도상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고물 증기기관차를 운행이 가능하게 보관하는 일에 목숨이 걸려 있다.

김일성 시대엔 전기가 끊겨도 석탄으로 달릴 수 있는 증기기관차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때는 폭격을 받아도 터널 안에 숨으면 안전했다. 하지만 스마트 폭탄이나 벙커버스터가 활용되는 요즘, 북한이 전시에 철도를 활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철도 간부들도 그 정도 상식은 알고 있으니 증기기관차에 별로 관심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철도 노동자들은 보관 중인 증기기관차에서 구리와 알루미늄으로 된 부품을 훔쳐 중국에 팔았다. 김 철도상은 이를 막지 못해 죽었고, 평양 철도국 간부들은 쓰지도 못할 증기기관차가 눈에 거슬리니 고철로 중국에 팔다가 걸려 죽었다.

북한 당국도 이제는 증기기관차가 필요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증기기관차를 잘 보관하라는 김일성의 유훈이 존재하니 시대착오적인 관리를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이젠 그만 없애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유일하게 유훈을 수정할 수 있는 김정은은 아직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지금 북에 올라간 한국 조사단의 눈에는 낡은 노반과 레일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철도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인식 변화가 없다면 아무리 한국이 새 철도를 깔아줘도 제대로 사용하긴 어렵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북한 철도의 일면이다.

김두얼 명지대 교수는 지난달 30일 발표한 글에서 “북한 철도 발전은 1970년대 이후 멈춰 있는 게 아니라 1945년 이후 거의 변화가 없다”며 “경제 발전보다 정치적 목적을 우선시한 결과 철도 투자에 거의 나서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옳은 말이다. 북한 지도부의 우선적 관심사에서 멀어진 철도는 인프라뿐만 아니라 인력까지 다 망가졌다. 요즘은 신체나 가정환경 때문에 군에 가지 못하면 할 수 없이 가는 곳이 철도다. 주는 것도 없는데 군대와 같은 규율을 세운다고 들볶으니 기피 1순위다. 지방 철도 종사자에겐 텃밭 가꾸기가 주업이고, 철도 일은 부업이다. 위에서 아래까지 관점을 확 바꾸지 못하면 새 철길을 만들어도 계속 사고만 터질 것이다.

요즘 한국에선 북한 철도를 개량하느냐, 새로 깔아야 하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북한 철도 실태를 제대로 안다면 답은 간단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머물러 있는 북한 철도는 새로 건설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 그전까진 어차피 없어질 철도를 약간 보수해 쓰면 충분하다. 북한 신규 철도 건설비를 우리 기준으로 계산해 10조 원이 넘느니 마느니 하면서 떠들 필요도 없다. 요즘엔 철도 옆 북한군 주둔지 이전 토지보상비용까지 줘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판인데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린 장비나 기술 보조만 하면 된다.

북한이 새 철길을 만들겠다면 부지는 그들이 해결해야 한다. 인력이 부족하면 군 병력이라도 투입하는 성의 정도는 마땅히 보여야 한다. 이는 북한이 과거의 잘못된 철도관(鐵道觀)에서 벗어나려 하는지 판단하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밥상을 같이 차릴 순 있지만 밥을 억지로 떠먹일 수는 없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