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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칼럼]내 편인 척 내 편 아닌 내부의 敵

입력 | 2018-11-21 03:00:00

여야정 합의 ‘탄력근로제 확대’… 저지 위해 민노총 진보세력 결집
‘진짜 적은 적 같은 얼굴 아니다’… 前 정권 기저효과 남아 있을 때
옳은 결정과 쉬운 결정 중 선택을




고미석 논설위원

재판에서 온갖 술수를 써서 백전백승을 거둔 속물 변호사의 성공가도에 어느 날 브레이크가 걸린다. 돈 많은 남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희대의 악녀’라는 악명을 얻고 이미 여론 재판에서 유죄 낙인이 찍힌 여자의 법정 변호를 맡았다가 치욕적 패배를 맛본 것이다. 하지만 절치부심 끝에 최고법원에서 원심 파기 결정을 얻어낸다.

“검찰이 증거가 아닌 민의에 부응해 기소했다”고 맹공을 퍼부은 그는 “재판에 민의를 가져오면 사법은 끝이다” “진짜 악마는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을 때의 민의다” “판결은 국민 설문조사가 아니다”라는 열변으로 역전승을 거둔 것이다. 재판 후 의기양양한 표정은 상대 검사의 한마디에 얼어붙는다. “진짜 적은, 적 같은 얼굴을 하지 않는 법이야.” 애초에 그를 곤경에 빠뜨린 장본인은 바로 같은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자, 늘 지근거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일본의 코믹 법정드라마를 새삼 떠올리는 것은 드라마 뺨치는 일들이 현실에서 늘 벌어져서다. 현 정부와 그 지지 기반 간의 연대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그 계기는 탄력근로제 확대라는 이슈다. 대통령과 여야 원내대표가 모처럼 합의에 이른 정치 성과를 거뒀지만 갈 길이 순탄치 않다. 발목을 붙잡는 옛 동지들 때문이다. 정권 출범 이래 줄곧 자기 지분을 주장해온 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은 오늘 총파업을 벼르고 있고, 새 정부 고관요직에 많은 인원을 배출시킨 참여연대도 여기 가세했다.

친노조 정부와 노동권력은 옥신각신 말싸움도 벌였다.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라는 대통령비서실장의 말에 발끈한 민노총. “자신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또 노동자의 현실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부터 돌아보길 충고한다”고 논평했다. 그 말이 링 밖의 국민 눈에는 고스란히 민노총 스스로에 해당되는 비판으로 들리지 싶은데 말이다.

대검에서도 시위를 벌이는 민노총인데 무엇이 두려우랴. 그 못지않게 참여연대도 이 정권이 우습게 보이나 보다. ‘참여연대 정부’란 말이 생긴 게 어제 같은데 규제완화 입법 반대에 이어 탄력근로제에서 또 한번 정부의 뒷덜미를 잡는다. 어쨌거나 이 상태로는 포용국가도, 혁신성장도 요원한 상황이니 청와대와 여권은 민노총과 참여연대를 향한 일편단심이 오산인지 착각인지 제대로 따져볼 때가 온 것 같다. 그 틈새를 비집고 수도 서울의 수장은 17일 노동계 집회에 참석해 “노동 존중 특별시장”이라 자처하며 ‘노조활동이 편한 서울시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펼쳤다. 그 놀라운 순발력에 여권에서도 “이번에는 너무 과했다”고 얼굴을 찌푸린 모양이다.

이리저리 각자도생 흩어진 일단의 세력이 저마다 끝끝내 ‘정의의 깃발’을 앞세우는 점도 독특하다.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의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가 돌변하는 것을 지켜봐온 국민은 그들만의 리그 앞에서 그저 뻘쭘할 뿐이다. 일명 혜경궁 김씨 트위터 계정의 소유주가 누구인지와 별개로 또 다른 별칭이 ‘정의를 위하여’라는 것도 현실의 단면을 드러내는 징표처럼 보인다. ‘정의’가 참으로 헐값에 소비되는 시절이다.

그래도 한국의 대통령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협상 초안을 놓고 내각과 보수당에서 협공당하는 영국 총리보다 사정이 나은 편인지 모른다. 사면초가 상황에도 테리사 메이 총리는 “리더십이란 쉬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진짜 정치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내 편한테 ‘미움 받을 용기’로 버티는 모습에 국가 지도자의 결기와 영국적 전통이 느껴진다.

한국 정치의 유구한 전통이라고 할까. 이전 정권의 실패 덕분에 누렸던 ‘기저효과’의 유효기간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우리끼리’라는 오랜 밀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민주의 광장으로 나오니 불협화음이 더 커지는 상황이다. 여기서 대통령이 소망한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진영을 넘어 대의를 위한 국민적 공감과 연대에서 힘을 이끌어 낼 수밖에 없는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겠는가.

다시 새로운 걸음을 떼야 한다. 그 첫발은 바로 나의 진짜 적은 누구인가를 온전히 가려내는 것이 아닐까. 내 편인 척 내 편 아닌 그들의 정체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 말이다. 오래된 조언을 유념하면서. “가장 사악한 적은 내부의 나쁜 조언자다.”(소포클레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