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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구 기자의 對話]“장례도 끝났고… 이제 죽는 것만 남았나요? 하하하”

입력 | 2018-09-03 03:00:00

생전(生前)장례식 치른 암환자 김병국 씨




그는 인터뷰 내내 쾌활했다. ‘만약에 죽기 전에 꼭 보고 싶어서 초청한 사람이 안 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고 묻자 그는 “분해서 못 죽을 것 같은데?”라고 웃으며 말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정승집 개 죽으면 가도 정승이 죽으면 안 가는 게 세상인심. 진심으로 망자(亡者)를 기리기 위해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밥 한 끼라도 함께 먹고 떠나면 참 좋을 텐데…. 지난달 14일 오후 4시 서울 동대문구 시립동부병원에서는 한 노인의 생전장례식이 열렸다. 자신의 부고장(訃告狀)을 보낸 이는 말기 전립샘암을 앓고 있는 김병국 씨(85). 살아 있는 사람의 장례식이란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 탓에 몇몇은 쭈뼛거렸고, 몇몇은 울먹였지만, 손을 잡은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와줘서 고마워…. 우리 그때 좋았지? 행복하게 살아.” 》
 
―생전장례식이 외국에는 더러 있는데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것 같습니다.

이진구 기자

“저는 젊을 때부터 죽음이란 걸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죽은 뒤에 누가 왔는지도 모르는 장례식보다는 살아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 얼굴 보고, 밥 한 끼 함께 먹고 가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해요. 죽음은 한 인생의 마무리잖아요.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에게 박수를 쳐주듯이, 삶이란 경기를 끝내는 모든 사람은 결과와 관계없이 박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했을 뿐이지요.”

―그래도 자신이 죽는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어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있나요? 가는 것도 마찬가지겠죠.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안 죽는 것도 아니고…. 원래 3개월 남았다고 진단을 받았습니다. 1년 전에…. 그런데 연명치료도 안 받고, 항암주사도 안 맞는데 아직 견디고 있네요. 그래서인지 지금은 아주 마음이 편합니다.” (항암주사도 안 맞으신다고요?) “난 항암주사 맞으면 죽어요, 하하하. 오죽하면 암보다 항암치료가 더 아프다고 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 마지막 모습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기억되고 싶지도 않고…. 연명치료에 집착하면 대부분 치료 중에 죽으니까 마지막을 준비할 기회도 별로 없지요. 오래 사는 건 생각하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으면 그 이상 좋을 게 없겠죠.”

―진단이 잘못됐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하하하, 전 조직검사도 받지 않았어요. 1차 검진 때 무슨 수치가 나왔는데, 예를 들면 5정도가 나오면 암 가능성이 있는 거래요. 근데 전 100이 넘었다니까…. 뭐 더 확인할 필요도 없던 거죠.” (그래도 사람 마음이 안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길 바라는 게 인지상정인데….) “주변에서 자꾸 권해서 ‘정 받으라면 받기는 할 텐데 별 의미는 없지 않느냐’고 했지요. 그랬더니 의사 선생님도 굳이 받을 필요는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미 거의 확실한데 두 번 세 번 고통받는 것도 싫고요.”

―장례식을 앞당겼다고 들었습니다만….

“두세 달 전에 마지막으로 고마운 사람들 얼굴이나 보는 자리를 만드는 게 어떠냐고 주변과 상의했죠. 근데 알다시피 엄청나게 더웠잖아요? 죽겠더라고요, 하하하. 제가 이런 표현을 쓰는 게 적절한가요? 그래서 좀 선선해진 다음에, 9월 초쯤에 하자 그랬는데 의사 선생님이 지금이 제일 몸 상태가 좋으니 하려면 지금 하는 게 좋다고 하더군요. 1, 2주일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그래서 앞당겨 잡은 게 8월 14일이었던 거죠. 날짜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그가 직접 쓴 부고장.

―장례식에 검은 옷 대신 예쁜 옷을 입어 달라고 하셨더군요.

“예, 초청장(부고장)에 그렇게 썼지요. 장례식 콘셉트를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으로 정했거든요. ‘죽는 게 어둡고 외롭고 쓸쓸한 게 아니다. 이 세상 즐겁게 살다가 이제 당신들과 작별할 때가 왔다. 그동안 날 사랑해줘서 고맙다. 마지막으로 이 한마디 말을 남기고 싶다’ 이러면서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축하하는 파티 식으로요. 그래서 축하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그렇게 즐겁게 보내고 싶었어요. 그런 자리에 검은 옷은 안 어울리잖아요? 우리 장례문화도 이젠 바뀌어야 해요. 조문객 대부분이 망자는 알지도 못하면서 사실 상주(喪主)와의 관계 때문에 가니까요. 고인에 대한 추모보다 얼마를 내야 할지를 더 고민하고…. 망자 입장에서는 자신을 추모하는 조사도 들을 수 없고, 정말 보고 싶은 사람이 와도 인사도 할 수 없지요. 그보다는 아직 살아 있을 때 서로 옛이야기 하고 남은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면서 가면 얼마나 좋아요.”

실제로 장례식은 그의 바람대로 조문객들이 그와의 추억을 회상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작은 축제 같은 행사로 진행됐다. 그는 평소 가장 좋아한다던 여성 듀엣 산이슬의 ‘이사 가던 날’을 불렀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노래가 끝난 뒤 잠시 동안 기력이 빠질 정도로 목청껏 불렀다고 한다. 그는 부고장은 초청장, 조문객은 초청객이라 불렀다.

생전장례식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김병국 씨.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많이들 오셨나요.

“한 30명 정도 올까 싶었는데 50명이 넘게 왔어요. 전혀 모르는 사람도 많아서 ‘누구지?’ 했는데 생전장례식이 어떤 건가 궁금해서 온 사람들이라고 하더라고요.” (초청한 분들은 다 왔습니까?) “네, 다들 왔죠. 요 근래에 사이가 소원해진… 제가 친동생 이상으로 좋아했던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걔도 왔더라고요. 죄송하다고 하면서…. 살아서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더라면 영영 못 보고 갔을 텐데 참 다행이죠.”

―생전장례식에 대한 다른 의견은 없었습니까.

“주변에서 반대나 다른 말을 한 사람은 없는데… 병원으로는 생전장례식을 열지 말라는 전화가 왔었다고 하네요. 전화를 받은 우리 간호사가 수상해서 이름하고 전화번호를 대라고 했더니 뚝 끊었대요.” (왜요?) “이게 좀 더 깊게 생각하면 존엄사나 안락사하고 연결될 수 있어요. 스스로 생전장례식을 치른다는 것은 죽음을 인정하고 더 이상 연명치료를 안 받는다는 의미가 되잖아요. 생전장례식이 하나의 문화가 되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존엄사나 안락사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종교계나 의료계에서는 그런 걸 반대하니까…. 아마도 그런 생각을 가진 누군가가 생전장례식이 알려지니까 항의 전화를 한 게 아닌가 싶어요. 하나 분명히 할 게 있는데 연명치료를 안 받는 것과 삶을 포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예요. 전 삶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제 삶을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시키고 싶을 뿐이죠.”

그는 쾌활했지만 살아 있는 그의 죽음에 대해 물어야 하는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 작은 침묵도 수차례 이어졌다. 어색함을 풀려고 말을 돌렸는데 그는 나를 배려한 듯 유머로 분위기를 바꿔줬다.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나오셨나 봐요?(인터뷰는 병원 앞 작은 벤치에서 했다. 도착했을 때 이곳에 있는 그를 봤고, 그 자리에서 인사를 나누고 바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 담배 피우려고요.” (네? 담배요?) “하루에 5개비 정도 피우는데 의사 선생님이 더 이상은 피우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암이시라면서….) “지금 제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또 걸릴 것도 아니고, 하하하.”

―이북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지요. 아버지가 지주였는데 1947년 열네 살이던 신의주동중 1학년 때 북한에서 숙청 바람이 불면서 외삼촌과 둘만 서울로 왔습니다. 위로 누나가 7명이고 제가 막내였죠.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에는 강원도 홍천군청에 들어갔는데 월급이 너무 적더라고요. 그래서 대한전선이란 곳에 취직했고, 월남전 때 파월 기술자 모집한다고 해서 베트남도 갔다 왔고, 이후 건설회사 몇 군데를 다니다가 은퇴한…, 그 뒤에는 노인 복지를 위해 노년유니온이란 곳에서 사회운동을 좀 했고… 뭐 평범한 인생이죠.”

그는 아내와는 사별했고, 자녀들과는 오래전에 절연했다고 한다. 노년유니온은 노인 권익과 복지 향상을 위해 활동하는 노동조합. 그는 지난해 초 이 단체 위원장에 선출됐으나 병으로 물러났다.

―기초생활수급자라고 들었는데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하하, 글쎄요. 생각하기 나름이겠죠. 고시원에서 혼자 살았으니 형편이 좋은 건 아닌데…. 나라에서 주는 돈하고, 일부는 노인일자리사업에 참여해서 버는 돈으로 살았습니다. 노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각종 제도들이 있는데 정작 노인들이 그런 게 있는지, 어떻게 하면 기초생활수급자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잘 몰라요. 그런 걸 알려주면서 시작했는데…. 우리나라가 노인 예산 자체는 부족하지 않아요. 제대로 효율적으로 쓰이지 않는 게 문제지요.”

노년유니온에서 활동하기 전부터 그는 서울 은평구에서 노인들을 위한 사회운동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노령연금의 문제나 기초생활수급자들의 열악한 생활을 보도하는 기사나 인터뷰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손님이다.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으신가요.

“노인들을 위해서 기초연금을 개선하는 데 좀 일조했다는 거…. 그거 하다가 건강을 해쳐서 중간에 쓰러졌으니까요. 지금은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없어요.”

―마지막으로 주변에 남긴 말이 있으신지요.

“유언요? 특별한 것은 없지요. 죽은 뒤에는 따로 장례식을 치르지 말고 바로 화장해서 뿌려 달라고 했을 뿐….” (유품이나 특별히 남기신 것은….) “재산 같은 걸 말하는 건가요? 네, 큰 게 있지요. 저를 지금까지 도와준 사람들…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재산이죠.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회복지사님은 18년 동안이나 저를 돌봐줬어요. 정말 고맙죠.”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