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속으로 떨어졌지만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막내아들 면(])이 나를 안고 부축했다. 그 장면에서 나는 잠이 깨었는데, 무슨 징조인지 알지 못했다.” 말에서 떨어지고 막내아들의 부축을 받다니, 상서롭지 않은 꿈인 건 분명했다. 그날 저녁이었다. 천안에서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그는 겉봉에 쓰인 통곡(慟哭)이라는 글씨만 보고도 막내아들이 죽었음을 직감했다.
그는 아들이 자신을 부축하던 꿈을 떠올리며,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느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함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그러나 장수 체면에 드러내놓고 울 수가 없어 염간(鹽干), 즉 소금 굽는 사람인 강막지의 집으로 가 숨어서 통곡했다. 아들이 전사했다는 편지를 받고서는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했고 며칠 후에는 “코피가 한 되 남짓” 났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면이 죽는 꿈을 꾸고는 목 놓아 울었다”라고 쓰인 11월 7일자 일기가 말해주듯, 꿈을 꾸는 것이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전부였는지 모른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이때의 꿈은 아들을 살아있게 하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였다. 현실에서는 아들을 살려내는 게 불가능하니까 그것이 가능해지는 꿈을 꾼 것이다. 다시 죽더라도, 죽기 전에는 다시 살아있는 거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영웅도 그런 꿈에 의존했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