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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 칼럼]공무원의 영혼을 미리 짓밟지 말라

입력 | 2017-03-20 03:00:00

통일·외교·안보 공무원들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한반도평화포럼의 논평은 “배 째 드릴까요”를 상기시킨다
집권 가능성이 높다고 미리 공무원의 영혼을 짓밟고 알아서 기라고 요구할 순 없다
정권교체기의 나쁜 선례 5년 후에는 없었으면 좋겠다




심규선 고문

일주일 전 ‘박근혜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적폐 청산 시급하다’라는 제목의 ‘한반도평화포럼 기획위원회 긴급논평’이라는 것을 읽으며 참 여러 가지를 느꼈다. 회원들의 지적 수준이 높은 단체도 이처럼 편협한 성명을 당당하게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더불어민주당이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고도 구구절절 민주당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꼼수의 참신함에 감탄했다. ‘긴급’이라는 말도 생뚱맞았지만, 만약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가 대통령이 될 게 확실하니 그 전에 ‘긴급하게’ 충성심을 표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면 충분히 이해한다.

포럼의 회원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외교 안보 부처에서 일했던 고위직과 두 정부의 외교 안보 노선을 지지했던 학자들이 많다. 핵심은 대북 햇볕정책과 한미동맹 중심의 외교 안보전략 수정이었다. 그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니 논쟁은 의미가 없다. 다만,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우선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박근혜 정부가 추진해온 모든 정책의 탄핵을 의미한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논리적 비약이 너무 심하다. 민주당은 집권하면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을 재개하고, 사드를 철거하며, 한일 위안부 합의도 백지화하겠다고 말한다. 그럴 수 있다. 모든 정부는 가장 옳은 정책이 아니라 가장 옳다고 생각되는 정책을 선택한다. 그렇다고 결과가 좋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외교 안보 노선을 바꿀 때도 ‘증오’가 아니라 ‘분석’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포럼은 ‘전지전능한 관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외교 안보 정책은 깡그리 틀렸다고 단죄한다. 10년간 집권을 했었고, 북한에 대한 퍼주기로 북핵 개발에 일조했다고 비난 받아온 그룹의 이런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다. 박 대통령 탄핵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정책에 대한 안티는 예전보다 강해질 것이다. 더욱 겸손한 정권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공무원에 대한 치졸한 겁박은 또 뭔가. “관료들은 지금 즉시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고? 포럼이 국민의 대표기관인가. “각 부처의 공무원들도 더 이상 부역행위를 저지르지 말기를 당부한다”는 말에서는 노 정권 시절의 “배 째 드릴까요?”라는 협박이 떠오른다. 김·노 정부 때도 공무원들은 그 정부의 노선에 맞춰 일을 했다. 어느 정부가 실패했다면 그건 공무원의 실패 이전에 공무원을 지휘하고, 정무적 판단을 한 집권층의 실패다. 문 전 대표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지지 그룹인 민간 포럼이 공무원들을 겁박하는 것은 주제넘다. 공무원들의 자존심을 미리 짓밟지 않길 바란다. 정권을 잡으면 그때 가서 충성하는 사람은 중용하고 부역하는 사람은 솎아내도 늦지 않다. 지금은 줄을 서지 말라고 경고하는 게 오히려 대인배다.

안보 환경과 미래에 대한 상황 인식은 왜 그리 낙관적인가. 논평은 “우리는 현재의 혼돈과 위기도 곧 극복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누가 친구였고, 누가 훼방꾼이었는지도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한국이 마치 미국과 중국만큼 강대국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하다. 이런 말을 하면 그들은 사대주의 근성을 버려라, 한국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공간은 늘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과거에도 어려움을 극복했으니 미래에도 극복할 것이라는 낙관론은 거부한다. 한반도 주변은 김·노 정부 때와도 다르고, 앞으로 더 달라질 것이다. 국민은 낙관해도 좋으나, 리더들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게 정상이다.

논평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30년의 짧은 민주주의 역사에서 이룬 기적과도 같은 성과”라고 했다. 미국의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야밤에 도둑질하듯이”라고 비난했다.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어찌 이리 잔망스러운가. 노 대통령이 탄핵됐다면 그것도 ‘17년의 짧은 민주주의가 이룬 기적’이라고 했을까. 동맹국을 도둑에 빗대고도 나중에 도와달라고 한다면 그게 도둑놈 심보일 것이다.

한반도평화포럼은 이 칼럼에 대해 보수적, 편파적 시각에서 일방적으로 비난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공이다. 포럼의 논평을 읽고 느꼈던 위화감을, 포럼도 내 칼럼을 읽고 느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 다만, 내 칼럼은 포럼의 논평만큼 편협하지는 않다고 자신한다. 포럼이 정권 교체기에 나쁜 선례를 남겼지만 5년 후에는 흉내 내는 단체가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니 말이다.
 
심규선 고문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