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70돌 맞아 책낸 신동식 해사기술회장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은 “진수회의 역사가 곧 한국 조선산업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9일 만난 신동식 한국해사기술(KOMAC) 회장(83)은 자부심에 가득 차 이렇게 말했다. 정 전 회장이 거북선 그림이 있는 500원짜리 지폐를 내밀며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 도입을 설득했다는 것은 신화 같은 역사다. 하지만 신 회장은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동문이라는 밑거름이 없었다면 한국이 지금 세계적인 조선 강국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이 학과 동창회 이름은 ‘진수회’다. 새로 만든 배를 물에 띄울 때 치르는 진수식에서 비롯됐다. 진수회가 학과 창립 70주년을 맞아 최근 ‘진수회 70년,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출간했다. 현재 2600여 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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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에 입학한 건 1951년. 부산으로 피란 간 후 그는 부두에서 탱크 대포 등을 실은 미군 수송선 뱃짐을 점검하는 일을 했다. 산더미만 한 배를 매일 바라보며 ‘바다를 정복하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교육 환경은 열악했다. 교수도, 번듯한 교재도 없었다. 졸업 후 스웨덴으로 가 현지 조선소에 취직했다. 현장은 혹독했다. 기능공 양성소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꼬박 5개월을 강행군했다. 설계도 보는 법, 철판을 자르고 붙이는 법 등 밑바닥 일부터 시작했다. 고생은 빛을 발했다. 그는 영국 로이드선급협회, 미국선급협회 등 국제기구로부터 한국 최초의 검사관으로 선발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외국에 있던 그를 ‘호출’했다. 당시 국내 조선업 상황은 아주 열악했다. 기술 고문으로 방문한 부산의 대한조선공사 조선소에는 풀이 허리까지 자라 있었고 거미줄이 무성했다. 직원들은 몇 달째 월급을 받지 못해 고철을 쌀로 바꿔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그는 총체적인 산업계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은 예상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국행을 택했다.
얼마 뒤 그는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으로 돌아왔다. 해사(海事)부문을 담당하게 된 그는 ‘한국 조선업 마스터플랜’을 내놓았다. 대형 선박을 만들 자본도 없는 상황. 그의 계획은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됐다. ‘쓰레기통에선 장미가 피어나지 않는다’란 냉소적인 외신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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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회장은 “국가 차원의 추진력 그리고 동문들의 땀방울이 있었기에 한국 조선업이 30∼40년 만에 독일 영국 일본을 제치고 조선업계 제1의 국가로 발돋움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늙어 죽기 전까지 열심히 뛰어다니며 조선업계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 나같이 열정적인 늙은이도 한 사람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최지연 기자 lim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