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일 불면의 밤… ‘종북’에 선 긋다
1주일 전인 19일 오전 9시 박 소장 등 헌재 재판관 9명은 헌재 1층 대심판정에 딸려 있는 합의실의 조그마한 탁자 앞에 둘러앉았다. 2013년 11월 대한민국 정부가 통합진보당을 상대로 청구한 헌정 사상 초유의 정당해산 심판 사건의 인용 여부를 표결하는 순간이었다.
사건 접수 이후 410일 동안 20차례 공개 변론을 열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평의를 거듭했지만 보안 유지를 위해 이례적으로 선고 1시간 전에 투표를 한 것. 조용호 서기석 강일원 안창호 김창종 이진성 김이수 이정미 재판관과 박한철 소장 순서로 의견을 밝혔다. 6번째 순서인 이진성 재판관이 해산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밝혀 이미 해산 결정에 필요한 6표가 확보됐다. 이어 김이수 재판관만 반대 의견을 냈을 뿐 8 대 1로 해산이 결정됐다. 재판관들 스스로도 이날 표결 결과에 적잖게 놀랐다고 한다. 회의 내용은 곧바로 대심판정에서 공개됐다. “북한식 사회주의 실현이라는 숨은 목적을 가진 통진당은 해산하고, 소속 국회의원 5명의 의원직을 박탈한다.”
그러나 선고 이후 반응은 “헌법의 적으로부터 우리 헌법을 보호하는 결단”이라는 찬사와 “민주주의의 훼손”이라는 비난이 엇갈렸다. 통진당은 ‘국회의원 지위 확인’ 소송을 낸다며 저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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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관 9명은 선고까지 엄청난 압박을 받았다. 선고 직후 재판관과 통화한 한 법조계 인사는 “고생했다고 했더니 ‘정말 고생했다’고 답하더라”고 전했다. 9명 중에서도 박 소장과 주심 이정미 재판관은 마음고생과 몸 고생이 모두 심했다.
박 소장은 사건 접수 이후 검찰 후배들과의 정기 모임마저 발길을 끊었다. 불면증으로 잠을 편히 이루지 못한 날이 많았고 극심한 피로로 입술이 심하게 갈라지고 터졌다. 박 소장은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을 재판관들을 위해 재판관 사무실에 간이침대를 하나씩 넣어 줬다. 박 소장은 ‘사심 없는 독일 병정’으로 통한다. 자녀도 없고 2009년 모친이 생전에 다니던 절에 전 재산인 10억 원 상당의 아파트를 기부했다. 사사로이 연연할 게 없어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소명 의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독서를 즐겨 프랑스와 독일 역사에 해박하고 한시도 즐겨 쓴다. 대구지검장 시절엔 매일 오전 4시 반에 일어나 팔공산 갓바위에 올라 국가를 위해 108배를 했다.
주심인 이 재판관은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고3 수험생의 학부모다. 선고 당일 오전 5시까지 검토를 거듭한 뒤 잠시 퇴근했다가 곧바로 다시 출근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에서는 진보 성향으로 분류하기도 했지만 법조계 내에서 이 재판관은 ‘뉴트럴(중립적)’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한 고위 법관은 “일부 사람이 이 재판관을 놓고 ‘신발을 거꾸로 신은 것 아니냐, 믿었던 당신마저’라고 말하고 있다”면서 “그가 재판관 중 유일한 여성이고 나이도 어리니 추임새를 넣은 격이다. 일방적으로 짝사랑해 놓고 호응을 안 했다고 욕하는 격”이라고 말했다.
장관석 기자 jk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