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녕 논설위원
정두언은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정무부시장을 지냈고, 대선 때와 당선인 시절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핵심 측근이다. 정권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 만한 사람이 이런 발언을 했으니 사실 여부를 떠나 여권이 발칵 뒤집혔다. 광우병 촛불시위까지 겹친 터라 이 대통령은 정국 무마를 위해 참모진을 교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통령의 수족이자, 형인 이상득 의원의 분신과도 같았던 박영준은 입성 3개월여 만에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오래전의 사건을 길게 반추한 것은 ‘정윤회 동향’ 문건으로 촉발된 지금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박근혜 대통령이 어떻게 마무리할지 궁금해서다. 두 사건은 묘하게 닮았다. 지금의 사건은 ‘문고리 3인방’으로 일컬어지는 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비서관과 조응천 전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 간의 알력이 기본 구도다.
다만 2008년 사건의 경우 문건(그것도 청와대의 공식문서) 작성과 유출로 파생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말대포로 촉발돼 검찰 수사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파장도 지금만큼 크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이 대통령의 뒤처리는 물렁했다. 박영준은 얼마 안 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으로 복귀했고, 지식경제부 2차관을 맡아 자원외교에까지 나섰다. 만사형통(萬事兄通)이란 신조어를 낳았던 이상득 의원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들에 의한 국정농단과 인사 개입 구설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2년 뒤 정두언이 자신과 동료 의원들에 대한 이상득 박영준 측의 정치사찰 의혹을 제기해 양측은 다시 격돌했다.
정권의 성공을 위해 힘을 합쳐도 모자랄 공신과 측근들이 사사건건 충돌하니 국민의 불신은 커지고 국정의 동력은 약해졌다. 싸움에 연루됐던 인사들은 모두 뒤끝이 좋지 못했다. 이들 외에 대통령의 친구, 멘토를 비롯해 숱한 측근과 친인척들이 이런저런 비리에 연루돼 감옥에 갔다. 대통령도 결국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초장부터 이 대통령이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측근과 친인척 관리에 단호함을 보였다면 이 지경까지 갔을까.
정윤회 문건 관련 수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결과도 대충 짐작이 가능하다. 박 대통령과 참모들에겐 명예회복 차원에서 결과가 중요할지 몰라도 국민의 뇌리 속엔 이미 고장 난 청와대와 불투명한 국정 운영의 잔상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잔상을 최대한 빠르고 말끔하게 지워나가는 것이 지금부터 박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다. 이명박 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