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특파원 칼럼/고기정]끌려 다니지 말자

입력 | 2014-09-29 03:00:00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23일 미국 뉴욕에서 북한에 ‘인권 대화’를 제안했다. 참 절묘한 악수(惡手)다. ‘북한 인권 고위급 대화’에서 나온 말이었다고 하지만 득보다 실이 커 보인다. 8월에 제안한 남북 고위급 회담과 이번 인권 대화는 남북관계에서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권은 북한의 아킬레스건이다. “우리 공화국에는 그 어떤 인권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북한의 반박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유엔이 미국 주도로 북한 인권을 논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의 대응이다.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드레스덴 선언을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로 이끌어 내고 남북 간 화해를 증진시키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미국의 전략적 인내나 대북 압박과는 결이 다른 우리식 접근법이었다.

물론 인권은 양보할 수 없는 가치다. 하지만 지금 인권 대화를 제기해서 북한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것은 비난과 반발뿐이다. 전략적으로만 따진다면 북한 인권 문제는 당분간 미국과 언론, 시민단체에 맡겨놔도 된다. 탈북자의 인권이 문제라면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와 물밑에서 협의할 일이다. 탈북자를 한국으로 안전하게 데려오는 게 남북 관계 개선이라는 목표를 그나마 해치지 않는 최선의 대안이자 그들의 인권을 위한 길이다.

인권 대화는 다분히 미국을 의식한 제안으로 비친다. 북한 응원단의 인천 아시아경기 참여 불발로 한반도 정세가 반전될 동력이 꺾인 뒤여서 더 아쉬운 대목이다.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미국이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진 고고도(高高度)미사일방어(THAAD) 체계의 한국 배치는 북한은 물론 대중 외교를 흔들 수 있는 악재다. 중국이 발의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은 대미 관계를 긴장시킬 수 있는 요인이다.

한국 외교는 숙명적으로 주변 강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 보유는 게임의 룰을 바꾸고 있다. 2006년 북한 1차 핵실험 이후 한국은 줄곧 핵 폐기를 주장해 왔지만 북의 핵능력은 갈수록 고도화됐다. 북핵은 김씨 정권의 존망과 결부돼 있다. 당근과 채찍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베이징 외교가에서는 “북핵은 외과적 수술 외에는 제거할 방법이 없다”는 말이 돌고 있다.

우리 식의 외교가 필요하다. 완전한 핵 폐기만 외쳐서는 박 대통령이 8·15경축사에서 제안한 ‘작은 통로’조차 열기 어렵다. 더디고 힘들겠지만 북핵 해법을 한 정권의 임기가 아닌 중장기적 차원에서 단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지, 북한의 핵 능력이 고도화되면 어떤 나라가 가장 부담스러울지 따져 보자. 김씨 정권이 스스로 핵을 버릴 수 없고 외부의 압력으로도 핵을 폐기할 수 없다면 내부의 힘으로 핵을 폐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역설적으로 북핵이 한국의 4강 외교에서 지렛대가 될 수 있는지도 고민해 보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반역사적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그는 적어도 대북 외교에서 수동성을 버리고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실익을 챙기려 하고 있지 않은가.

북한은 중국이 자기를 버리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북한이 지난해 2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취임을 한 달 앞두고 3차 핵실험을 벌인 것도 이런 계산을 깔고 한 도발일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세계의 질서를 재편하려 하고 북한이 핵으로 무장한 상황에서 미국은 과연 한국을 버릴 수 있을까. 우리 외교가 주변에 끌려 다니지 않고 ‘노(No)’라고 해야 할 때는 ‘노’라고 할 수 있는 시기가 이미 와 있는지도 모른다.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