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해 논설위원
1979년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선 뒤 재무부 재정금융심의관에서 옷 벗은 이헌재는 미국 유학을 떠난다. 뉴욕 출장길에 나선 경기고 6년 선배 김우중이 “공항 앞에서 아침 식사나 하자”고 하자 ‘고단한 유학생’ 이헌재는 보스턴에서 뉴욕까지 안개 길을 헤치고 9시간 동안 운전해 온다. “어렵습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하버드대 최고경영자코스(AMP) 추천서를 써 달라는 부탁에 김우중은 추천서에다 14주에 2만5000달러(약 2500만 원)인 학비까지 줬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회장님,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라며 대우에 들어가 ㈜대우 전략담당 상무, 대우반도체 대표이사를 지냈다. 2년 반 동안 김우중의 세계 경영과 함께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넉 달 뒤 DJ는 “5대 그룹도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작업)에 넣을 수 있다”며 압박했다. 김우중은 사재(私財)를 포함해 12조 원을 담보로 내놓고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그리고 두 달 뒤 1999년 10월 유럽·아프리카 출장을 떠났고, 2005년까지 행방불명 신세가 됐다.
김우중은 당시 상황에 대해 “채권단이 자금 지원을 해주지 않아 내가 계속 항의하니까 여러 경로를 통해 ‘김 회장이 있어서 안 된다고 하니 해외에 좀 나가 있어라’는 얘기가 들어왔다. 그래서 DJ에게 전화해 확인하니 ‘3∼6개월만 나가 있으면 정리해서 잘되도록 하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기호 경제수석도 만나 ‘잘 처리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전도사’라는 이헌재는 김우중 부재 때 고래 배를 가르듯 거침없이 대우를 털어버린다. 이헌재는 이를 ‘시장의 힘’이라지만 김우중은 ‘정부의 기획해체’라며 분노했다. 이헌재가 대우를 너무 잘 알아서 혹독하게 칼질했다는 뒷담화도 나왔다. 김우중이 ‘아차!’ 했을 땐 이미 늦었다.
DJ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린 현대그룹에는 회사채신속인수제라는, 전례 없는 특혜성 제도를 만들어 도와줬다. 현대는 대북(對北)사업 후원 기업이었다. 대우 입장에선 이런 차별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를 깼다며 자화자찬한 DJ정부가 재벌 대안으로 내놓은 ‘벤처 띄우기’는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