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국가가 혼란이나 곤경에 빠졌을 때 올곧은 말로 방향을 잡아주는 우리 사회의 어른이었다. 민주화 이후 좌우 갈등이 벌어지면서 국가 원로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세태가 만연해 있다. 많은 국민이 세월호 유족들의 아픈 마음에 공감하면서도 유족들이 지나친 주장을 한다고 생각될 때 선뜻 반대 의견을 내세우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시점에 천주교의 최고지도자인 염수정 추기경이 “유족들의 아픔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세월호 유족도 양보해야 한다”는 쓴소리를 우리 사회에 던지고 나섰다.
그는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갈등과 관련해 “하느님의 문제를 인간이 ‘내가 하겠다’고 나서면 빠지기 쉬운 위험이 ‘이용’”이라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이후 정치권과 사회 일각에선 교황이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유족들의 요구를 지지하기라도 한 듯 ‘제 논에 물대기’ 식으로 강경론을 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염 추기경은 약자에 대한 종교적 관심과 선동정치는 구분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또한 염 추기경은 “세월호 유족들도 어느 선에서는 양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유족들로서는 너무 큰 아픔 때문에 사법체계나 법치주의 원칙 같은 말이 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염 추기경의 표현대로 우리 사회가 ‘죽음의 자루’ 속에 갇혀 서로를 적으로 돌리는 데 끝없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염 추기경이 “세월호 문제와 관련해 우리의 힘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도 세월호 정국에 갇혀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고언으로 볼 수 있다.
새정치연합은 여당과의 합의를 번복한 끝에 세월호 특별법안을 도출했으나 유족의 반대를 이유로 스스로 팽개쳤다. 이후 새누리당은 유족들과 직접 만나 어제 두 번째 협상을 벌였다. 130명의 국회의원을 가진 제1야당이 사실상 입법권을 유족들에게 넘긴 듯한 모습이 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