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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고미석]노인이 가난한 나라

입력 | 2013-08-29 03:00:00


영국에서 은퇴한 노인들이 인도의 낡은 호텔로 모여든다. 적은 비용으로 인생의 황혼기를 멋있게 보낼 수 있다는 과장 광고에 속은 사람들이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저마다 다른 사연과 목적으로 인도행을 선택했지만 막상 와보니 기대와는 영 딴판이다. 하지만 그들은 온갖 우여곡절 끝에 풍부한 인생 경험을 살려 낯선 땅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작년 개봉한 코미디 영화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의 줄거리다.

▷영화 속 얘기지만 선진국에서도 노후 준비는 만만한 일이 아닌가 보다. 은퇴자가 생활비가 적게 드는 곳을 찾아 먼 타국까지 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미국으로 이민 간 지인의 집을 몇 년 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뉴저지의 노인아파트에 홀로 살던 그분은 “아들이나 딸보다 미국 정부가 효자”라고 말했다. 자기 같은 저소득층 노인을 위해 나라가 용돈(연금) 주고 싼 임차료의 아파트까지 제공했다는 얘기였다.

▷우리 사정은 심각하다. 어제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 회원국 가운데 미국 일본 영국 등의 노인 빈곤율은 하락한 반면 우리나라만 유독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불황 속에 노인을 먼저 배려한 나라들과 달리 한국의 노인복지 재정 지출은 주요국 중 가장 적은 편이다. 가족 간 유대를 중시하는 전통 가치관이 무너져 자식에게 기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한국 노인의 삶은 고달프다.

▷우리에게도 노인이 한 집안의 기둥이자 가장으로 존경받던 시절이 있었다. 1884년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이 땅을 밟은 호러스 알렌은 경로 효친의 전통에 감탄하며 ‘조선은 노인들의 천국’이라 표현했다. 1973년 런던에서 아널드 토인비를 만난 임덕규 월간 디플로머시 회장에 따르면 세계적 석학은 한국의 효(孝)사상과 경로사상을 ‘온 인류의 으뜸가는 사상’이라 말했다고 한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으로 견뎌야 할 시간도 점차 길어지는 시대다. 토인비가 부러워한 우리의 정신문화를 되살리자면 정부 역할도 중요하다. 노인이 가난한 나라에서 노인이 행복한 나라로 가는 길을 우리 모두 고민할 때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