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경제부장
미국의 문화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모든 번역은 오역(誤譯)”이라고 말했다. 한 나라 국민의 오랜 역사와 경험, 고유한 정서가 축적된 언어를 다른 나라말로 바꾼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다.
근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문화는 항상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다. 이 순서가 뒤집어진 것은 일본이 메이지(明治)유신을 한 1868년부터다.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에서는 철학 과학 문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번역 붐이 일어난다. 한자는 중국에서 만들어졌지만 우리가 지금 쓰는 현대 한자어의 상당 부분은 이 시기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개인, 신혼여행, 철학, 과학, 시간 등과 같은 한자어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한 신조어들이다.
우리나라의 번역력은 일본과 비교하기가 부끄러운 수준이다. 서양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그리스-로마 고전조차도 대개 일본어나 영어로 된 것을 재번역했다. 두 번의 ‘오역’을 거치다 보니 뜻이 잘 통하지 않거나 생경한 표현투성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올해 74세의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는 ‘국보급’ 번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독보적인 그리스-로마 원전 번역가다. 단국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시절인 1990년대 중반부터 번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그가 지금까지 번역해낸 그리스-로마 고전은 60여 종에 이른다.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헤로도토스의 역사,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등 고전 중에서도 고전으로 꼽히는 책들이다.
대단한 점은 이 같은 역작의 절반이 그가 2004년 단국대에서 정년퇴임을 한 이후 나왔다는 것이다. 이미 7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도 천 교수는 건강을 위해 일주일에 세 번 등산을 하는 것을 빼고 나면, 대부분의 시간을 자택에서 번역작업을 하는 데 보낸다. 그가 하루에 평균적으로 번역해내는 그리스-로마 원전의 분량은 1페이지에서 1페이지 반 정도. 매우 더디면서 인내심과 체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비결을 그에게 물어보니 “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1개월가량 번역작업을 쉰 적이 있는데, 마음도 불안해지고 건강도 오히려 나빠져 이후로는 절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게 됐다”는 것이었다.
인문학 연구 지원활동을 하는 단체인 재단법인 플라톤아카데미가 2년 전 천 교수에게 연구교수 직을 제안했다. 연 3600만 원씩 2년간 7200만 원을 지원받으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천 교수는 “인문학 분야에는 어렵게 생활하는 젊은 학자들이 많으니 나 대신 그들을 지원하라”며 고사했다. “그럼, 행사에 잠시 와서 자리를 좀 빛내 달라”는 재단 측의 거듭된 요청에, 천 교수는 너무나 미안하다는 어조로 이렇게 말끝을 흐렸다.
“거기에 다녀올 시간이면 원전을 스무 줄 이상 번역할 수 있는데….”
‘웰에이징’은 멋지게 나이를 먹는다는 뜻이다.
천광암 경제부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