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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손톱이 자라듯 달이 차듯 상처도 아문다

입력 | 2012-11-03 03:00:00

◇노랑무늬영원/한강 지음/310쪽·1만2000원·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사 제공

상처와 회복에 관한 소설집이다. 인물들은 자신의 내면을 할퀴고 간 고통을 기억하고, 움푹 파인 상처를 가만히 응시한다. 지독한 슬픔과 공허가 책장 가득하다. 하지만 아무리 아픈 기억도 언젠가는 점차 희미해지듯, 깊게 파인 상처들에선 조금씩 새살이 돋는다.

인간의 고통과 치유는 어쩌면 소설을 이루는 기본적인 테마일 것이다. 한강의 소설이 특별한 것은 그 과정에서 느끼는 인간의 감정 변화를 극히 세밀하고, 조심스럽게 잡아낸다는 것이다. 하루 동안 자란 손톱의 넓이를 알아채듯이.

중편 ‘노랑무늬영원’을 비롯해 단편 6편을 한 권에 묶었다.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단편 ‘에우로파’다. 각각의 소설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듯,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서도 ‘에우로파’가 가장 애처롭게 다가온다.

대학 시절 만난 ‘나’와 인아는 10년 넘게 친구로 지내 왔다. 아니 솔직히 ‘나’는 인아를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실은 여성성이 가득한 남자. 밤이면 화장을 하고 인아와 함께 거리를 산책한다. 작가는 감정의 떨림 차이를 섬세하게 집어낸다. ‘나’의 속에 있는 여성성이 인아를 동경하지만, 또한 남성성이 인아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이런 내면의 갈등을 잔잔히 짚은 수작이다. 에우로파. 목성의 ‘달’. 얼음덩어리 위성의 골은 차가운 얼음으로 채워지지만, ‘나’의 상처는 깊어만 간다.

소설가 한강

단편 ‘왼손’은 담담하고 차분하게 읽히는 한강의 평소 소설 스타일과 차이점이 있다. 한 은행원의 왼손이 갑자기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그를 파멸로 이끌어 가는데, 무엇보다 거칠고 속도감이 있다. 작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읽기가 즐거웠던 것은 무엇보다 한강의 문체가 미려하기 때문이다. ‘문밖으로 빗소리가 추적추적 들려오던 그 오후, 두려워하는 두 입술이 만나던 순간을. 두 사람 모두 입술을 벌리지도 못한 채, 서로의 부드러움이 떠날 것이 두려워 뛰는 심장들을 맞붙이고 있었지요.’(단편 ‘파란 돌’에서) 조심스럽고, 설레고, 불안한 첫 키스의 순간을 그린 장면이다. 이렇게 메모해 두고 잘 보이는 데 붙여 두고픈 문장들이 소설집 곳곳에 숨어 있다. 작가가 한자 한자 공들여 눌러쓴 문장들은 아껴 읽을 수밖에 없다.

아쉬운 점도 있다. 상투적인 이야기 구조가 반복되는 듯하다. 현재 인물의 혼돈과 상실을 그려 준 다음, 이 슬픔의 근원이 되는 과거 사건을 기술하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구조가 그렇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땐 한 권의 장편을 읽은 듯한 느낌도 든다.

이번 한강의 소설집은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밥공기와 같다. 오늘도 사람들은 하루분의 슬픔을 푹 숟가락으로 떠서, 힘겹게 넘긴다. 그렇게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