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 왕에게 공손한 강태공, 조선에선 당당한 강태공, 왜?
강태공이 후에 주나라 문왕이 되는 서백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있다(왼쪽 그림). 이 작품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그린 강태공 이야기 그림이다. 양기성(梁箕星), ‘태공조위도(太公釣渭圖)’, ‘예원합진 (藝苑合珍)’에 수록, 종이에 채색, 가로 29cm, 세로34cm, 일본 야마토분카간(大和文華館). 강태공과 서백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오른쪽 그림). 뒤도 돌아보지 않는 강태공의 눈치를 살피는 서백의 모습에서 감상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강태공조어도(姜太公釣魚圖)’, 종이에 채색, 가로 57cm, 세로 90cm,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인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민화로는 ‘삼고초려도(三顧草廬圖·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가 정성을 들인 고사를 그린 그림)’와 지금부터 살펴볼 ‘강태공조어도(姜太公釣魚圖)’가 가장 유명하다. 강태공은 중국 주(周)나라 때 사람이다. 보잘것없는 시골 노인이었으나 서백(西伯·후에 주나라 문왕이 됨)의 발탁으로 제후에 오른 기적의 주인공이다. 그는 평생 위수(渭水)에서 낚시로 소일했는데, 낚싯바늘에 미끼를 끼우지 않은 채였다. 미끼 없는 낚시에 물고기가 걸려들 리 만무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당시 서백은 은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현인이 필요했다. 그는 태사의 점괘에 따라 위수로 사냥을 떠나 그곳에서 강태공을 만났다. 천하의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서백은 강태공의 비상함에 감탄해 그를 자신의 수레에 태워 대궐로 돌아왔다. 강태공은 서백의 희망대로 은을 멸망시키는 큰 공을 세우고 제후국인 제(齊)나라의 임금이 됐다. 이 이야기는 인재의 중요성과 더불어 기다림의 지혜에 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전한다.
○ 같은 이야기, 상반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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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강태공 이야기지만, 민화 ‘강태공조어도’(파리 기메동양박물관 소장)는 양기성의 그림과 정반대의 인식을 보여준다. 등 뒤로 병사들이 떠들고 있지만 강태공은 꼼짝 않고 낚시에 열중이다. 서백은 사모를 올려 쓴 단정치 못한 모습에 강태공의 눈치를 보는 표정이 역력하다.
여기서는 강태공과 서백의 처지가 바뀌었다. 70세가 넘도록 기다렸던 기회가 왔지만, 강태공의 태도는 오히려 당당하다. 그의 등 뒤로 말과 개 울음소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민화에서는 정도를 지나쳤다. 병사들은 상관이 무슨 일을 하든 말든 시끌벅적한 모습이다.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양기성의 그림에서 볼 수 없는 인간적인 풍경이다.
이것은 서민의 입장에서 바라본 강태공 이야기다. 그림은 권력 있는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여 권위를 깎아내리고 힘없는 사람은 당당하게 표현하여 위상을 높였다. 이와 더불어 중국 이야기를 조선의 것으로 재해석한 면도 돋보인다. 중국이 아니라 조선의 옷에 조선인의 면면을 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귀에 익은 탓에 어느새 강태공 이야기가 우리의 것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구수한 옛이야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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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갤러리를 방불케 하는 컬렉션이다. 그런데 이들 그림은 춘화만 빼면 모두 고사인물도다. 그만큼 서민들 사이에서 고사인물도의 인기가 높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고사인물도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져 있는 데다 교훈까지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고사인물도를 보노라면, 할아버지가 손주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구수한 옛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주인과 손님이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 chongpm@g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