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은 왜 ‘무한도전’에 열광할까
더 큰 비극은 이제 스펙터클이 사람들로부터 경탄을 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디지털 혁명은 천기누설에 가까운 광경들을 전방위적으로 쏘아댄다. 사람들은 이제 아마존 정글과 세렝게티 대초원, 심지어 별들의 탄생과 소멸까지 ‘손 안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사람들은 자꾸만 어디론가 떠난다. 인도로, 다람살라로, 혹은 부탄으로. 하나같이 가난하고 척박한 곳들이다. 이 화려한 도시의 불꽃을 두고 왜 그토록 삭막한 곳으로 떠나는 것일까. 그건 지극히 당연하다. 빛이 화려하면 내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몸에서도 ‘화(火)’ 기운을 많이 쓰면 허화(虛火)가 망동한다.”(동의보감) 불면증, 우울증, 공황장애 등이 다 거기서 비롯한다. 더 결정적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자기로부터의 소외’가 바로 그것이다. 하여 이 빛의 폭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외부를 향해 쏘아댔던 빛을 자기 내부로 향하기 위해서.
이상한 현상은 또 있다. 이 현란한 디지털의 시대에 사람들은 왜 ‘무한도전’과 ‘1박 2일’ 같은 프로그램에 열광하는가. 이들의 공통점은 오직 맨몸으로 상황을 돌파하는 것. 말하자면, 사람들은 몸과 몸이 마주치면서 만들어지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사는 그 자체로 집합적이다. 여기서는 ‘다다익선’의 법칙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과 차이가 더 핵심이다. 타자들의 시끌벅적한 향연, 그것이 곧 서사적 네트워크요, 길이다. 따라서 이 길 위에선 늘 유머가 생성된다. 유머는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과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역설 혹은 아이러니다. 이 전복적 여정 위에서 또다시 삶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고로, 서사와 유머야말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최고의 다리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영화 ‘올드보이’에 나오는 인디언의 경구) 정치적 비전이 스펙터클에서 서사로 이동해야 하는 가장 단순하고도 명쾌한 이유다.
고미숙 고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