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실용기타]中문화 토대 세운 漢 무제의 국가경영

입력 | 2012-02-11 03:00:00

◇ 한 무제 평전/ 양성민 지음·심규호 옮김/ 840쪽·3만5000원·민음사




중국 한나라 제7대 황제인 무제(기원전 156년∼기원전 87년)의 누이 융려공주의 아들인 소평군이 연이어 죄를 지었다. 그는 무제의 조카이면서 사위이기도 했지만 무제는 그에게 가차 없이 사형을 내렸다. ‘한서’ 권65 동방삭전에는 당시 무제가 한 말이 기록돼 있다. “법령이란 선제께서 만든 것이다. 동생 때문에 선제의 법령을 어긴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고조의 사당에 들어간단 말인가. 또한 아래로 만백성을 대할 수 없느니라.”

기원전 141년 16세의 나이로 즉위해 54년 동안 황제의 자리를 지킨 무제는 인의에 바탕을 둔 덕치를 시행하되 선진 법가 사상을 수용하여 엄격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며 나라를 다스렸다.

중국 역사에서 무제는 진시황과 더불어 ‘진황한무(秦皇漢武)’로 불릴 정도로 영향력 있는 황제로 꼽힌다. 그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사업을 계승 발전시켰고 장생불로를 바랐다는 점도 진시황과 비슷하다. 하지만 진시황이 ‘갱유(坑儒)’에서 보듯 유가를 멸시한 반면 무제는 유가 사상을 국가의 통치 사상으로 삼고 태학을 세웠으며 백가의 학문을 두루 끌어들였다. 이로써 그는 중국 봉건시대 문화 사상 정책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그는 중국을 활력 넘치는 개혁과 발전의 시대로 이끈 인물이었다. 최초로 연호를 사용했으며 무장을 강화하고 변경을 위협하던 흉노 세력을 약화시켜 안정적인 국가 운영의 기틀을 다졌다. 서역을 비롯한 변방 개척에 집중한 그는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해 비단길을 개척하고 여러 나라와 화친 관계를 맺어 동서 교역과 문화 교류의 기초를 마련했다. 경력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능력을 바탕으로 인재를 등용한 점도 돋보인다.

물론 무제는 전쟁을 일삼고 재정을 낭비해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웠으며 음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는 과오도 남겼다.

선거의 해를 맞아 훌륭한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우리로서는 무제의 국가 경영을 들여다봄으로써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상을 고민해볼 수 있다. 방대한 분량으로 무제의 실적과 실책을 객관적 시각에서 담담하게 서술해 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