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엔 전국 560여개… 초중등 의무교육 따라 역사 뒤편으로
기청공민학교의 전신인 ‘기청야학원’의 6회 졸업생들이 1938년 3월 17일 촬영한 졸업기념 사진.
○ 타올랐다 스러지다
공민학교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그러나 불꽃을 태운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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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공민학교는 1960년대 말 초등교육이 보편화하면서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몇 곳 남지 않은 공민학교의 학생 연령대도 청소년에서 40, 50대 주부계층으로 옮아갔다. 1984년, 명맥을 이어가던 공민학교 3곳 중 2곳이 문을 닫으면서 기청공민학교가 국내 유일의 공민학교로 남게 됐다.
초등과정인 공민학교보다 2년 후에 만들어진 중등과정 고등공민학교도 이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1970년대 7만여 명에 달하던 고등공민학교 학생 수는 1980년대부터 급격히 줄어들어 1990년대에는 500명 이하로 떨어졌다.
1985년 ‘중학교 의무교육 실시에 관한 규정’이 제정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00년대 들어 중학교 의무교육 전면화가 완료되면서 고등공민학교는 그 존재 의미조차 잃어버렸다. 지난해 기준으로 정식인가를 받은 고등공민학교는 경남 통영시의 충무고등공민학교 등 4곳만 남았다. 재학생도 186명에 불과하다.
○ 마지막 공민학교의 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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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청공민학교는 1947년 정식 공민학교 인가를 받은 뒤 수천 명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왔다. 사진은 1960∼70년대의 수업 장면으로 추정된다. 서울YWCA 제공
1922년 ‘경성여자기독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된 서울YWCA는 1924년 부녀자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원을 설립했다. 이 야학원이 ‘기청여학원’(1936∼1947년)을 거쳐 1947년 ‘기청공민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 6·25전쟁 발발로 1950∼1952년 20개월 동안 문을 닫은 기간 외엔 기청공민학교는 언제나 학생들로 넘쳐났다. YWCA 본부가 명동에 있었던 것도 학생들이 꾸준히 입학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학교는 6·25 동란으로 2년간이나 중단했다가 이후 원래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통을 깨고 남녀 학동기(學童期)의 아동을 받아들이게 된다. 전쟁이 휩쓸고 간 서울은 폐허나 다름없는 도시였다. 서울의 중심지인 명동에는 비교적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고 YWCA 근방에는 가난한 아동이 많았다. 전쟁으로 한쪽 부모를 잃은 아이들, 학교 갈 형편이 못되는 아이가 많은 것을 보고 김유선 간사는 그들을 위한 공민학교를 열기로 하고 8월 1일 문을 열었다.”(‘서울YWCA 50년사’ 64쪽)
기청공민학교는 YWCA 본부의 재건축이 이뤄진 1996년 봉천종합사회복지관으로 임시 이전한 뒤 아예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명동 시절인 1995년까지 2584명이 졸업한 이 학교는 이전한 뒤에도 300여 명의 졸업생을 더 배출했다. 다음 달 제72회 졸업식이 끝나면 졸업생은 6명이 더 늘어 최종적으로 2905명에 달하게 된다.
서울YWCA 측은 “기청공민학교는 가장 어려운 시대, 배움의 기쁨을 경험하지 못한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쳐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고 운명을 개척하도록 하는 일에 90여 년간 함께해 왔다”며 “여성의 삶을 깨워 사회를 변화시키는 YWCA의 사명과 책임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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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