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입안 참여 이경식 前경제부총리
이경식 전 경제부총리가 12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경제개발계획 수립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영동=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12일 충북 영동군의 농가에서 만난 이경식 전 경제부총리(79)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라는 5·16 군사정부의 지시를 받았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본보 1월 12일자 A6면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출범 50주년…
한국은행에 다니던 1961년 경제기획원(EPB)에 합류해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참여한 그는 2, 3차까지 기획원 기획국 과장, 기획국장으로 개발계획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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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사정부가 집권하자마자 만든 EPB는 1차 경제개발계획을 발표하며 곧바로 한국 경제개발의 중추가 됐다. 그 안에서도 기획국은 ‘맨땅에 헤딩하는’ 부서, ‘꿈을 먹고 사는 사람들’로 불렸다.
첫 계획은 주판알을 튕겨 가며 맨손으로 만들어졌다.
“젊다는 이유로 겁없이 달려들었어요. 그런데 더 잘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밤새워 가며 일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발표한 1차 계획을 놓고 ‘좀 안다’는 사람들은 ‘한국이 발전하려면 농업을 잘해야 한다. 수출은 말도 안 된다. 한국이 물건을 만들어 봐야 어느 나라가 사주겠냐’며 비판했어요. 무역 1조 달러가 넘어선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죠.”
이 전 부총리 등은 그런 반론을 헤치고 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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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연간 7% 성장이라는 목표도 당시 일본이 추진하던 ‘국민소득배증계획’을 본뜬 것이었다.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성장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실제 1차 경제개발계획에 나타난 ‘비전’이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소득 확대, 수출 등은 당시로서는 꿈같은 얘기였어요. 2차 계획 때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등을 만들 때에도 ‘그런 게 왜 한국에 필요하냐’는 반대가 더 많았죠. 특히 교수들은 이런 계획의 현실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어요.”
이 전 부총리는 1972년부터 대통령실에서 근무하면서 박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봤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은 상공부 회의 등 경제 관련회의에 매번 참석해서 꼼꼼히 챙겼다”며 “‘지난번에 얘기한 거 어떻게 됐냐’며 수치 하나하나까지 챙겼기 때문에 당시 한국이 개발계획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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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의 원조는 컸다. 이 전 부총리는 “가발 등 수출을 다 합쳐야 1억 달러 미만이었다”며 “외자는 유엔군에게 용역을 팔거나 군납해서 나온 것이 더 많았다”고 회상했다. 그런 과정에서 한두 개 보너스가 생겼다. 1965년경 한일협정을 맺고 베트남 특수가 생긴 것이다. 그는 “군대는 5만 명 가서 월급 타먹고, 근로자 2만 명 나가서 돈 벌고, 기업체 70개 나가서 미군한테 용역하고 그래서 돈이 꽤 들어왔다”고 말했다.
1993년 2월 경제부총리에 임명된 이 전 부총리는 금융실명제 도입을 지켜봤다. 하지만 우루과이라운드 쌀 개방 문제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지금 한국 경제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흠 없는 게 어디 있겠냐마는 그렇게 못하던 나라가 이만큼 잘사는 걸 보면 잘하고 있다고 봐야죠. 이제 나이가 많아서 무리 안 하고 살아가렵니다. 회고록을 만들어 놨는데 죽은 뒤 10년 후 내려고 합니다.”
영동=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