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서울병원 암연구소에서 만난 백순명 소장.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암세포 유발 유전체와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백 소장은 1981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 국립암센터와 조지타운대 병리과 교수를 지냈다. “지금까지 5만 건의 조직 슬라이드를 봤다”는 백 소장으로부터 생애 최고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HER2 암세포에 염색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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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 조직을 들여다보면 나뭇가지에 포도송이가 달린 것처럼 보인다. 정상세포는 이런 규칙성을 가지고 가지런히 배열돼 있다. 반면 암세포는 모양이 제멋대로인 데다 세포핵이 비정상적으로 커져 있다. 백 소장은 한마디로 “암세포는 못 생겼다(ugly)”고 말했다.
백 소장은 그날 실험실에서 유방암 세포 가운데 하나인 HER2 유전자에 반응하는 항체를 갈색으로 염색하는 데 성공했다. 유방암 환자의 20%가량은 HER2 유전자의 수가 늘어나 있다. 정상세포가 아니라 암세포에만 HER2 유전자가 늘어나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부터 암세포만 골라 제거하는 표적 치료제 개발에도 탄력이 붙었다.
“염색에 성공한 뒤 곧바로 HER2 유전자에 이상이 나타난 수백 명의 유방암 환자의 병력을 확보해 기록을 추적했습니다. 암세포가 갈색으로 염색된 환자는 빨리 사망하고, 염색이 잘 안된 환자는 오래 산다는 것을 밝혀냈죠.”
그 후 백 소장은 HER2 표적 치료제인 ‘허셉틴’ 3차 임상시험을 주도했고 초기 유방암 환자가 허셉틴 주사를 맞으면 재발률이 50%로 줄어든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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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소장은 25년간 유방암 진단법과 치료제 개발에 몰두했다.
2004년 백 소장은 ‘온코타입DX’라는 유방암 유전자 진단 키트를 개발했다. 유방암과 관련 있는 유전자 250개 가운데 암의 예후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21개 유전자를 골라 이 진단 키트로 반응을 살펴볼 수 있다. 결과에 따라 유방암 환자 가운데 항암치료를 받을 환자와 항호르몬 치료로 충분한 환자를 가려낸다.
“초기 유방암 환자 중 50% 이상이 항암치료를 받지 않아도 암이 재발하지 않습니다. 온코타입은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불필요한 치료를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온코타입은 미국에서 유방암 치료의 표준으로 채택돼 최근 6년간 20만 명 이상의 환자가 사용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가격이 비싸 아직 진료 현장에 보급되지 않고 있다.
○ “암 세포, 예상보다 똑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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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치료제는 날로 발전하고 있다. 암세포가 주변 조직을 파고드는 것을 막거나 세포핵 분열을 억제하는 등 암이 퍼져가는 과정을 하나씩 차단하는 것이다. 이런 표적 치료제를 쓰면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백 소장은 “연구를 거듭할수록 희망만큼 절망도 커진다”고 말했다. 암 연구자들이 처음 유전자 테스트로 암을 들여다봤을 때는 암세포란 간단히 한두 개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으로 생각했다. 돌연변이 몇 개만 찾으면 암을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최근 들어 염기서열 분석법으로 암세포를 들여다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암 유전자가 복잡하게 망가져 있었다. 염기서열도 헝클어져 있고 숫자도 늘어나고 도대체 어느 유전자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나 암이 발생할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고 했다. 백 소장은 “이제 새로운 시각에서 암 연구를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환자마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유전자가 다르다. 환자마다 ‘맞춤형’ 임상시험을 하고 ‘맞춤형’ 약을 개발할 시기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백 소장은 삼성암연구소에서 한국형 유방암 진단 키트를 개발하고 신약 임상 연구 방법을 구상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국의 암 연구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병리학에 대한 지원이 미국에 비해 훨씬 부족하다는 것.
“2009년부터 삼성암연구소장을 맡게 된 것은 열심히 일하는 후배 임상 연구가들의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이젠 유전자와 염색체에 기반한 암 임상이 완전히 다시 시작되는 단계입니다. 한국 의사들도 충분한 경쟁력을 지녔습니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