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식탁 박금산 지음 332쪽·1만1000원·민음사
도와 달라는 레지나의 호출을 받고 달려간 민우에게 레지나는 말한다. “오늘 날 데려다 주시면, 있잖아요. 언젠가 꼭 자 드릴게요.” 민우는 레지나를 도와주지만 관계는 맺지 않는다. 그가 윤리적이어서? 아니다. 그녀가 곤경에 빠질 때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게 귀찮았고, 더 솔직하게는 책임지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앞 못 보는 그녀 앞에서 수음한다.
작품은 솔직하다. 장애인에 대한 연민도 동정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에게 평등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도움 없이 살아가기 힘들고, 장애인 간에도 극심한 우열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냉철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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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문제를 다루되 구질구질하게 쓰고 싶지 않았다.” 2001년 등단해 9년 만에 첫 장편을 낸 저자의 말이다. 장애인들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들을 삶의 주체로 그려보고 싶었다는 것. 말 못하는 남자(세키)가 앞을 못 보는 여자(레지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려다 누군지 모르기에 공포감을 느낀 여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리는 장면처럼 그들의 현실은 가혹하고 슬프다.
작품에 ‘아일랜드 식탁’은 나오지 않는다. 최근 신혼부부들에게 이런 이름의 식탁이 인기여서 ‘새 희망’의 의미로 제목에 썼다고 저자는 말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