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보도로 여성 첫 퓰리처상 美히긴스 기자의 딸 밴더블리크 씨
마거릿 히긴스 기자(왼쪽)가 6·25전쟁 직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출처 라이프
한국 정부는 2일 그의 6·25전쟁 보도가 미친 영향과 한미동맹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2등급 외교훈장인 흥인장을 수여한다. 훈장은 1966년 45세의 나이로 작고한 그를 대신해 딸 린다 밴더블리크 씨(51)가 받는다.
현재 미국 플로리다 주의 트로이대에서 상담 및 심리학 조교수인 밴더블리크 씨를 1일 동아일보 회의실에서 만났다.
―어머니가 지금 한국의 모습을 봤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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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긴스 씨는 도쿄특파원으로 부임한 지 6일 만에 6·25전쟁이 터지자 곧바로 한국으로 향했다. 그가 처음 송고한 기사가 폭파된 한강대교 소식이었다.
―히긴스 씨가 6·25전쟁을 통해 알리려고 한 것은 어떤 것인가.
“어머니는 한국이 공산화되면 전 세계가 공산화될 것으로 보고 우려하셨다. 당시 공산주의를 확장하려던 러시아가 한국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다고 판단하고 뉴스를 전했다.”
―어머니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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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어떤 점에서 강인했나.
“어머니는 ‘안 돼(No)’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 도착 직후 월턴 워커 장군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한국 밖으로 쫓아내려 했다. 그러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만나 한국에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해 계속 열정적으로 취재하고 퓰리처상까지 받았다.”
―어머니가 첫 여성 종군기자였나.
“아니다. 이전에 여성 사진기자도 있었다. 다만 어머니는 기자가 되기를 원하는 여성들에게 새로운 모델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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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밴더블리크 씨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전쟁을 취재하는 것은 분명히 쉬운 일이 아닌데….
“어머니는 군사령부에 앉아 있지 않고 전쟁터를 다니면서 병사들과 대화를 나눴다. 한국군과 미군 모두 어머니를 ‘매기’라고 부르며 좋아했고 또 존경했다. 전쟁터 이면의 현실에 대한 다양한 보도는 한국과 세계를 연결시켰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밴더블리크 씨도 대학을 졸업한 뒤 플로리다신문에서 몇 년간 기자생활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전선으로 향하는 어머니의 용기는 쉽게 따르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그 명성도 사라져가고 있다(fade away)”며 “한국이 아직도 어머니를 기억해줘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