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장비 턱없이 부족… 큰수술 엄두 못내”

입력 | 2010-01-25 03:00:00

본보 이진한 의사기자, 아이티 현지 진료 르포

병원 마당까지 환자 가득… 전기끊겨 어둠속에 밤 지새
110상자 1억어치 의약품… 수화물 제한 완화 ‘배려’도




 본보 이진한 기자(의사)가 23일 오후(현지 시간)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에스푸아르 병원에서 60대 여성 환자를 진찰하고 있다. 포르토프랭스=세브란스병원-한국기아대책 의료봉사단

22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3층 출국장. 110개의 의료물품 상자가 시선을 끌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한국기아대책-동아일보 의료봉사단이 아이티로 가져가는 의료물품이다. 물품의 가격만 1억 원이 넘는다. 지금까지 이런 규모의 의료봉사단은 없었다.

워낙 의료물품이 많다 보니 물건을 운반하는 데서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중량을 초과하는 짐이 많아 일일이 추려내 다시 싸야 했다. 공항 직원이 1인당 수하물을 2개에서 3개로 늘려준 ‘배려’가 고마웠다. 다만 수술할 때 소독제로 사용할 에탄올은 폭탄 제조에 쓰일 수 있다는 이유로 가져가지 못했다.

22일 오후 10시(현지 시간) 도미니카공화국에 입국했다. 역시 의료물품 운반에 꽤 시간이 걸렸지만 산토도밍고 공항 직원들이 자기 일처럼 도왔다.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한 시간은 23일 오후 4시(한국 시간 24일 오전 6시).

구호팀은 포르토프랭스 외곽에 있는 ‘E POWER’ 건너편에 베이스캠프를 세웠다. 오후 7시경부터 포르토프랭스 북쪽 델마 75에 있는 어린이병원 ‘에스푸아르 병원’에서 바로 구호 활동을 시작했다. 병원은 그야말로 난민 수용소 그 자체였다.

 입원실 부족… 천막서 대기 23일 아이티 수도인 포르토프랭스 북쪽 델마에 위치한 에스푸아르 병원. 입원실에 들어가지 못한 환자들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의료진과 의약품 부족으로 많은 환자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천으로 대충 발을 감싸고 있다. 포르토프랭스=세브란스병원-한국기아대책-동아일보 의료봉사단

골절치료용 ‘추’ 없어 물 채운 페트병으로…

병원 마당까지 환자 가득… 전기끊겨 어둠속에 밤 지새
110상자 1억어치 의약품… 수화물 제한 완화 ‘배려’도


입원실은 초만원이었다. 복도는 물론 빈 공간마다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고, 환자들이 줄줄이 누워 있었다. 2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입원실에 40여 명이 들어차 있었다. 그나마 입원실을 얻은 환자는 다행이었다. 더 많은 이가 마당에 설치된 임시 텐트에 누워 있었다.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많은 환자가 어둠 속에서 지내야 했다.

진료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넓적다리뼈가 부러진 환자는 일반적으로 뼈를 바로 펴기 위해 무거운 추를 사용하지만, 이 추를 구할 수 없어 돌멩이나 물을 가득 넣은 페트병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전신마취는 아예 불가능해 큰 수술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하반신 마취는 가능해 뼈가 부러진 환자의 상처 부위를 핀으로 고정하거나 상처를 꿰매는 정도의 수술은 가능했다.

손과 발에 골절을 입은 사람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마를 비롯해 피부 여기저기가 찢어진 환자도 많았다. 위생 환경이 나빠지면서 어린이 장염 환자, 치료를 받지 못해 상태가 악화된 고혈압과 당뇨병 등 만성질환자가 진료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병원에는 원장과 미국인 및 독일인 의사 등 6명의 의료진밖에 없었다.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 구호팀이 진료를 시작할 무렵 심장 염증이 의심되는 60대 여성이 병원에 도착했다. 환자 샤리트 앙트 씨(62)의 얼굴은 불안과 절망감으로 가득했다. 세브란스병원의 채윤태 감염내과 전임의와 함께 환자의 상태를 체크했다. 먼저 채 전임의가 청진기로 심장 상태를 확인했고, 이어 기자가 한 번 더 체크했다. 심장에서 잡음이 들리지 않아 심장 염증 가능성은 배제했다. 그러나 왼손과 왼발에 반신마비 증상이 나타나는 걸로 미뤄 뇌중풍(뇌졸중)이 의심됐다. 컴퓨터단층촬영(CT)이나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장비가 없어 일단 약물을 주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임신 3개월째인 나탈리 쥘랑 씨(26)는 다리 부위에 손상을 입었다. 배 속 아이 때문에 약을 처방해줄 수 없었다. 사촌오빠는 “내가 뭘 해줄 수 있는지 그걸 말해 달라”고 호소했다. 기자는 “현재 환자 상태는 괜찮은 것 같으니 당신이 당장 해줄 것은 없다”며 “일단은 지켜보자”고 말했다. 다행히 대부분의 환자와 보호자는 의사의 말을 잘 따랐다.

세브란스병원 의료진은 당초 전신마취 시설이 있는 ‘코뮈노테 병원’에서 진료할 계획이었다. 이날 첫 진료를 마친 구호팀은 문은수(정형외과 교수), 김원옥(마취과 교수), 박경호(외과 교수), 김경아(간호사) 씨로 수술팀을 구성해 코뮈노테 병원에 보내기로 했다. 에스푸아르 병원에는 기자와 역시 의사 출신인 SBS의 조동찬 기자가 남아서 응급환자를 보기로 했다.

김동수 단장은 “대부분 병원이 서 있을 곳이 없을 정도로 환자들로 가득 찼다”면서 “특히 코뮈노테 병원은 수술할 환자들이 병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길거리에까지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라 빨리 수술팀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한 의사·기자 likeday@donga.com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