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당시 구례경찰서장 故 안종삼 씨처형 명령 어기고 풀어줘 마을 평화 유지
부임한 지 1년이 갓 지난 안 서장은 이틀 전 상부로부터 좌익인사로 지목된 사람들을 처형하고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8년 여수·순천 10·19사건(여순사건)을 경험한 지역 유지들이 “더 많은 희생은 안 된다”고 간청하자 그는 고민 끝에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이들을 풀어줬다.
당시 구례경찰서가 좌익 활동이 두드러진 800여 명 중에서 480여 명을 적극 가담자로 분류해 유치장에 가둬 놓은 상황에서 이들을 살려준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당시 부하 경찰관들은 “그들을 보내면 우리 식구들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불안해했지만 안 서장은 결단을 내렸다.
광고 로드중
전세(戰勢)가 뒤집혀 1951년 1월 다시 구례서장에 부임한 그는 인민군 잔당을 소탕하고 치안을 확보한 공로로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그해 4월 안 서장이 전북 남원시 지리산지구경찰전투사령부로 발령이 나자 주민들은 그의 공덕을 기려 ‘은심동정호 덕고방장산(恩深洞庭湖 德高方丈山·은혜가 동정호 같이 깊고 덕은 방장산처럼 높네)라는 시구(詩句)가 담긴 10폭짜리 병풍을 선물했다.
안 서장의 공적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서를 통해 공개됐다. 안 서장의 셋째아들인 안승순 씨(75·전 곡성군수)는 “아버지의 공적이 정부 공식 문서에 기록돼 다행”이라며 “결정서에는 이념갈등을 넘어 생명을 중시한 아버지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말했다.
구례=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보도연맹:
이승만 정부가 ‘남한 내 좌익세력을 전향시켜 선량한 국민으로 만든다’며 1949년 4월에 만든 단체. 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으로 가입자 수가 30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6·25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보도연맹원을 북한에 동조할 수 있는 위험세력으로 간주해 가입자들을 구금하거나 즉결 처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