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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타고 떠나자]벚꽃 멀미

입력 | 2009-04-09 11:17:00


4월에 눈이 내리는 도시. 눈(雪)과 꽃잎과 햇빛이 구분되지 않는 곳.

벚꽃나무 35만 그루가 심어져 있는 경남 진해는 해마다 봄이 되면 상춘객이 몰리는 곳이지만 서울에서 먼 거리 때문에 정작 가보기는 어렵던 지역이었다.

KTX가 개통됐다고는 하나 여전히 KTX 동대구역에서 약 120㎞ 거리. 차를 가져가자니 서울에서 400㎞, 승용차로 약 6시간.

1박 2일 코스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개별 여행으로는 '견적'이 안 나오는 곳이 진해다. 그러나 이곳을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기차타고 떠나자 - 경남 진해

● '진해 1박 2일이 불가능하다고?'

기차 여행 전문 업체인 '퍼시즌 투어'의 당일치기 진해 벚꽃놀이 열차 상품을 이용해보았다. 오전 8시 반 서울역을 출발해 10시 15분 동대구역 도착, 이어 관광버스로 갈아타 12시 반 진해에 도착한 뒤 벚꽃놀이를 즐기고 오후 8시 55분 동대구역을 출발해 서울역에 10시 45분 도착하는 일정이다.

언뜻 보면 일정이 너무 빡빡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건 진해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오전 8시 반 서울발 KTX 열차를 타고 동대구역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이유는 아래 사진과 같다.

불편한 KTX 좌석에서 애벌레 같이 꿈틀거리며 몸부림치기를 1시간 45분. 동대구역에서 내려 여행사가 안내하는 대로 버스에 오른 뒤에도 고난은 계속됐다.

우등 고속버스 수준의 좌석이 아닌 일반 45인승 관광버스의 좌석은 KTX와 다를 바 없다. 등받이는 다소 더 젖혀지지만 좌우 간격은 KTX보다 좁아 옆 사람과 어깨를 기대고 앉아야 한다.

버스 타고 또 다시 1시간 45분.

'내가 이런 여행을 왜 왔나' 싶은 순간, 버스가 마침내 진해 시내에 들어서자 그동안 쌓인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

진해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섭씨 20도 가까이 포근한 날씨였지만 바람이 불때마다 벚나무들이 떨어내는 벚꽃 잎들로 인해 차창 밖 시야가 가릴 정도. 관광버스 운전기사도 와이퍼를 작동시켜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스위치에 손을 얹고 우유부단한 모습이다.

진해 시내 제황산 공원 앞 중원로터리에 버스가 정차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미 벚꽃 구경은 다 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버스에서 내려 약 100여m를 걸어 제황산 공원에 올랐다.

오르는 길은 계단과 모노레일 두 가지. 모노레일은 기능은 산을 오르는 케이블카이지만 생긴 것은 모노레일, 내부는 운전자 없이 스위치로만 작동하는 엘리베이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모노레일 요금은 왕복 3000원.

제황산 공원은 진해시 중심의 제황산(해발 107m)에 조성된 공원. 정상에는 진해탑이 있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짜리 탑 8층까지 가면 진해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9층에는 고압선이 설치돼 있어 일반인 출입은 금지.

탑 아래 마련된 진해시립박물관은 진해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볼 수 있는 영상물과 밀랍인형 등이 마련돼 있다. 박물관 현관 위 박정희 대통령 친필로 쓰인 '鎭海塔'(진해탑)이라는 한자 동판도 볼거리.

진해시는 가로 10㎞, 세로 10㎞ 정도 면적에 인구는 16만여 인구가 모여 사는 작은 도시다. 이런 좁은 공간에 심어진 벚나무는 인구보다 많은 35만 그루.

사람이 아닌 벚나무가 주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도시는 그야말로 가는 곳 마다 벚꽃 천지였다.

바람이 불어도 벚꽃이 날리고 바람을 피해 고개를 숙이면 땅바닥은 벚꽃 눈 밭. 지나가는 예쁜 여자의 뒤통수를 쳐다봐도 그 머리 위에는 어김없이 벚꽃 잎이 내려 앉아 있다.

제황산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 잠깐 실감해보는 영화 '클래식'의 감흥

벚꽃이 휘날리는 제황산에서 영화 '클래식'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주희(손예진)가 전보를 보내는 장면과, 실내에서 주인공들이 포크댄스를 촬영한 장소가 제황산에서 엎드려 코 닿을 거리에 있었다.

진해 우체국. 이 곳은 사적 291호로 우편 업무는 보고 있지 않다. 실제 업무를 보는 건물은 뒤편에 따로 마련돼 있다.

이 건물은 1912년 러시아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위로 떨어지는 벚꽃 잎들과 어울려 봄 분위기를 더한다.

조승우와 손예진의 로맨스를 떠올리는 관광객들이 잠시도 건물만 놓고 사진 찍을 짬을 주지 않는다.

● 벚꽃 때문에 멀미가 나다….

이미 벚꽃은 충분히 봤다. 버스 차 창 밖으로, 길거리에서 하늘에서 산 위에서….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진해우체국에서 진해역쪽으로 500m를 걸어가면 나타나는 여좌천. 이날 오후 3시경 여좌천 앞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관광버스들이 줄을 서 있었다.

여좌천은 여좌동 인근을 가로질러 난 실개천. 이중 약 500m 구간을 개천 양옆에 목재 데크를 깔아 산책로를 만들어놓았다.

산책로 주위로는 벚꽃들이 분홍색으로 줄지어 서 있고 개천 옆으로는 유채꽃이 노랗게 피어있다. 바람에 떨어진 벚꽃들이 물위에 떨어져 여행을 계속하며 때로는 물에 비친 햇빛과 누가 더 아름다운지 내기를 한다.

많이 봤다. 이제 집으로 갈 차례.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여좌천에서 약 3㎞ 떨어진 거리에, 이제는 열차가 다니지도 서지도 않는 경화역이 있었다.

열차는 끊겼지만 플랫폼과 철로는 그대로다. 철로와 플랫폼 주위를 지키고 서 있는 수 백 그루의 벚꽃 속에서 한차례 더 심호흡을 한 뒤에야 비로소 하루의 '벚꽃놀이가' 끝난다.

● 비로소 서울로…

경화역을 출발한 관광버스가 다시 1시간 40분을 달려 동대구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8시 10분. 8시 55분 출발하는 서울행 KTX를 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여행사 가이드는 '서비스' 라며 김밥과 삼다수를 관광객들에게 나눠줬지만 먹을 곳이 마땅치 않다.

동대구역 길 건너편 '서울 식당' 주인 할머니가 "어서 들어오시라"며 손짓한다. 강압적이지 않지만 거부하기 힘든 목소리. 경기도 경기다 보니….

"여행사에서 준 김밥이 있는데, 제육볶음만 시켜서 김밥을 먹어도 되겠느냐"고 묻자 흔쾌히 "좋다"고 한다.

제육볶음은 잘 시켰다. 매운 제육볶음을 삼킨 뒤에야 오늘 하루 벚꽃 때문에 생긴 멀미가 가라앉았으니까.

요금은 여행사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퍼시즌 투어의 경우 어른 아이 막론하고 평일 5만5000원, 주말 5만9000원.

나성엽기자 cp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