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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환자, 종합병원 응급실에 ‘북적’

입력 | 2008-12-01 02:59:00


집근처 갈만한 병원 없고… 가도 “수술한 병원 가라” 말만

30일 오후 3시 서울대병원 응급실. 침대가 모자라 복도에 줄지어 내놓은 간이침대에 흙빛 얼굴의 환자들이 누워 있다. 교통사고, 뇌출혈 등으로 갑자기 쓰러진 사람들이 실려 들어온다. 응급실은 병원에서 가장 어수선하고 불편한 장소다.

10월 식도암 말기 진단을 받은 이모(56·경기 남양주) 씨는 5일 째 서울대 응급실에 머물고 있다. 그는 한 달 반 동안 무려 세 번 응급실을 찾았고 그때마다 4, 5일 씩 머물렀다.

의료진은 진통제를 놓고 튜브로 위 속의 음식물을 제거해 주는 간단한 응급 처치만 해준다. 담당의사는 “복통의 원인이 식도암인데, 말기 암 환자여서 딱히 해줄 것이 없다”며 “집도 먼 이 씨에게 근처 병원에서 편히 치료받으라고 하지만 ‘갈 병원이 없다’고 한다”고 말했다.

▽지방서도 서울병원 응급실행=3차 종합병원 응급실 환자 10명 중 2, 3명은 이 씨와 같은 암 환자다. 지방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 환자도 있다. 송봉규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는 “암이 뼈로 전이된 말기 암 환자가 새벽에 ‘다리 아프다’며 부산에서 KTX를 타고 올라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암 환자들은 “원래 봐주던 병원이 가장 잘 안다는 믿음이 있는데다 다른 병원 가 봐야 ‘수술한 큰 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듣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의 암 환자 보호자는 “열이 심하게 나서 집 근처 종합병원 응급실을 갔는데 ‘수술한 병원 가라’는 말을 들었다”며 “이후 다른 병원은 아예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암환자가 응급실 차지=암 환자는 다른 환자보다 응급실에 더 오래 머문다. 이들은 ‘중환자’지만 급박한 치료가 필요한 ‘응급환자’는 아니어서 치료가 뒤로 미뤄지기 때문이다.

동아일보가 서울아산병원 등으로부터 10월 한 달간 암환자의 응급실 이용실태 자료를 받아 분석한 결과, 암 환자들이 일반 환자보다 응급실에 두세 배 더 오래 머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암 환자들에 밀려 뇌출혈 등 진짜 응급 환자들은 간이침대에서 응급치료를 받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암 환자들은 집 근처에 일상적 치료를 맡아줄 병원이 부족하다고 호소한다.

정은희 서울대병원 진료협력팀장은 “응급실의 암 환자 10명 중 한 명은 자기의 암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시설을 갖춘 병원을 찾지 못해 병원을 옮기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통완화 의료기관 절실=허대석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암은 치료와 관리가 모두 필요한 질환인데 관련 정책이 ‘치료’에만 초점 맞춰져 있고 ‘관리’는 소홀하다”고 지적한다.

믿을 만한 집 근처 병원이 없는 암 환자들은 3차 종합병원을 고집하게 되고, 이에 따라 1, 2차 병원은 찾는 환자가 없어 암 치료와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암 환자들이 3차 병원 응급실로 몰리는 악순환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는 것.

허 교수는 “통증 조절 등의 가벼운 치료는 집 근처에서 받을 수 있도록 관련 시설들을 늘리는 한편 말기 암 환자는 편안히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하는 의료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