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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순 드라마가 내겐 최고 항암제”

입력 | 2008-08-04 03:02:00

혈액암의 일종인 ‘비호지킨스 림프종’을 이겨낸 변수용 군이 여자핸드볼 국가대표팀 수비수 최임정 선수에게 사인을 받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4년간 백혈병과 싸우고 있는 고교생 변수용 군

‘정신적 버팀목’ 女핸드볼 대표팀과 꿈같은 만남

《꿈이 현실이 되자 소년은 말을 잃었다. 지난달 30일 오후 3시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선수촌 오륜관. 여자핸드볼 선수 15명이 훈련을 멈추고 변수용(17) 군 주변을 에워쌌다. “병실 침대에 누워 여자핸드볼 선수들이 나온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힘들게 사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구나 싶었어요. 그분들을 진짜로 보게 될 줄은….” 변 군은 A4 용지에 가득 써온 인사말을 반도 읽지 못하고 말을 멈췄다. 사인을 받기 위해 집에서 가져온 핸드볼 공만 만지작거렸다.》

이때 주장 오성옥 선수가 변 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수용이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꼭 금메달 가지고 올 거니까 빨리 나아야 돼.” 올해 초 감명 깊게 봤던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에서 배우 문소리 씨가 연기했던 실존 인물의 격려였다. 변 군의 오른쪽 뺨에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지난달 25일 부친상을 당한 임영철 감독은 “사내놈이 울긴 왜 울어. 나도 요즘 슬프다. 수용이도 우리 팀도, 다들 힘내자”며 박수를 쳤다.

변 군은 백혈병 환자다. 2004년 경북 청도군의 읍내병원에서 맹장수술을 받았으나 자꾸 배가 아파 대구 영남의료원으로 갔더니 혈액암의 일종인 ‘비호지킨스 림프종’ 진단이 내려졌다.

“수술 부위가 덧나서 큰 병원으로 옮긴 줄 알았는데 병실에 머리가 다 빠지고 마스크를 쓴 아이들뿐인 거예요. 나와 눈을 못 마주치는 엄마를 보고 죽을병에 걸린 거 맞구나 싶었죠.”

초기 진단이 맹장염으로 나온 바람에 암세포는 이미 온몸에 퍼져 있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14번의 항암치료를 변 군이 버텨낸 건 한 편의 다큐멘터리 덕분이었다.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딛고 아테네 올림픽에서 명승부를 펼친 여자핸드볼 선수들을 보며 변 군은 ‘동병상련’을 느꼈다.

“친구들은 백혈병이라고 하면 피가 하얘지는 걸로 알아요. 림프종이 어떤 병인지 알 리가 없죠.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무도 몰라준다는 게 서러웠는데 음지에서 묵묵히 목표를 이뤄가는 선수들을 보니 기운이 났어요.”

게다가 변 군은 핸드볼 마니아였다. 핸드볼 선수로 활약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핸드볼을 즐겨 봤다. 입원하기 며칠 전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 때 선수들이 보여준 움직임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변 군은 그날 이후 집에 있던 핸드볼 공을 병상의 머리맡에 두고 지냈다.

그리고 4년 뒤, 여자핸드볼 선수들의 사인을 공에 가득 채우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 이뤄졌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소원성취 프로그램에 변 군이 선정된 것. 또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회봉사단의 도움으로 13일 열리는 한국과 스웨덴의 여자핸드볼 경기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직접 응원할 수 있게 됐다.

아들 병 수발 중에 부모마저 하늘로 보냈던 아버지 변양수(51) 씨는 “이제야 하늘을 웃으며 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