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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오명철]법정 스님의 ‘버리고 떠나기’

입력 | 2006-01-09 03:02:00


살을 에듯 추웠던 지난 며칠, 자리에 누울 때마다 법정(法頂) 스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다섯이 되신 스님이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시중드는 상좌(上佐) 하나 두지 않은 채 손수 밥 짓고 빨래하며 엄동설한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인연으로는 속가(俗家)의 ‘머리 기른 제자’에 불과하지만 마음만은 노부모를 걱정하는 자식 못잖게 애틋하다.

모처럼 서울에 온 스님을 만났다. 새해 독자들에게 줄 덕담(德談)을 부탁했더니 “출가자에게 한 해가 오고 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말을 아끼면서도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하지만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자연의 이치로 누구도 이를 거스를 수도 없고, 거슬러서도 안 된다”고 당부하신다. 겨울이면 지병처럼 스님을 괴롭히던 천식도 사라지고, 얼굴 또한 맑아 보였다. 스님이 평생 화두(話頭)로 삼고 있는 ‘버리고 떠나기’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법정 스님의 생애는 몇 차례의 ‘버리고 떠나기’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출가(出家)다.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책 읽고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던 청년은 1954년 싸락눈이 내리던 날 홀연히 집을 나서 머리를 깎았다. 평소 흠모했던 등대지기의 꿈을 접고 ‘진리의 빛’을 찾아 나선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과 세속적 욕망을 버리는 대신 그는 진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다.

두 번째는 1975년 10월 1일 서울 봉은사 다래헌(茶來軒)에서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 불일암(佛日庵)으로 들어간 일이다. 글 잘 쓰고 의식 있는 40대 초반의 촉망받는 중진 스님이었던 그는 “시국 비판이나 하며 글재주만 부리다가는 중노릇 제대로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 칸 암자에서 혼자 밥 짓고 밭을 매며 17년을 지내면서 ‘무소유’, ‘산방한담(山房閑談)’, ‘텅 빈 충만’ 등 10여 권의 산문집을 펴냈다. 승속(僧俗)의 명예를 과감히 떨쳐 버린 덕분에 사색의 자유와 자연과의 교감을 얻게 된 것이다.

세 번째는 1992년 4월 19일 강원도 산골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오두막으로 다시 거처를 옮긴 일이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산중 암자에 방문객이 늘어나고 글 빚도 지게 되면서 수행에 지장을 받게 되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지인들은 물론 몇 안 되는 상좌조차 아직 스님의 거처를 모른다. 스님이 “누군가 내 거처를 알게 되면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큰스님’으로 불리며 절 집의 높은 자리에 앉는 대신 자신만의 수행 공간과 절대 고독의 희열을 얻게 된 것이다.

네 번째는 2003년 12월 21일 한 여신도가 오랜 간청 끝에 스님에게 시주한 서울 성북동 길상사의 창건 6주년 기념 법회에서 회주(會主·절의 원로 스님) 자리를 미련 없이 내놓은 일이다. 주지 한 번 맡지 않았던 스님이 떠밀리다시피 맡았던 자리였다. 하지만 차츰 틀이 잡혀 가자 “수행에는 정년이 없으나 직위에는 반드시 정년이 있어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을 주저 없이 실천한 것이다. 많은 이가 아쉬워했지만 스님은 큰 짐을 벗어던진 듯 편안한 모습이었다.

스님은 이날 법회 후 차 한 잔을 따라 주며 “때가 되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육신을 벗어버리고 싶다”고 지나치듯 말했다. 법정 스님이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이후 봄가을 두 차례만 길상사에서 공식 법회를 열고 있다.

수행의 고비마다 버림으로써 더 큰 자유를 얻은 스님이 올해로 출가 52년을 맞는다.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버리고 떠남으로써 더 큰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