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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고승철]선거바람이 두려운 기업들

입력 | 2005-12-28 03:01:00


프랑스의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유. 도심 가까운 곳에 작은 산이 있다. 정상에 올라서면 시야가 훤히 틔면서 쪽빛 지중해와 멋진 시가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삽상한 바람을 맞으면 선계(仙界)에 들어선 듯하다.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성당 주변엔 신자들의 소원을 새긴 작은 석판이 늘어서 있다. ‘새해엔 마리안과 꼭 혼인할 수 있기를…’, ‘피에르의 병이 빨리 낫게 하소서’ 같은 현세구복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글은 찾기 어렵다. 수백 년 전 것도 그렇다.

경건한 곳에서 세속적 욕망을 밝히다니 신성모독 아닌가. 그러나 이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어차피 중생은 내세보다 이승의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지 않겠나이까.

“먹고살 것이 넉넉해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는 항산항심(恒産恒心)을 설파한 맹자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물론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은 흔히 “최빈국인 방글라데시의 국민은 스스로 매우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서 부(富)의 가치를 애써 축소하려 한다. 그러나 최빈국 빈민층은 가난의 굴레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고 체념했기에 자족하는 게 아닐까.

가족 친구 친지 지인들에게 새해 소원을 물어보라. ‘세계 평화’ ‘남북한 통일’ 같은 거창한 것보다는 취업, 직장생활 안정, 사업 번창, 합격, 건강 등을 바라지 않으랴. 최대 다수의 국민이 이런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가 튼튼해야 한다. 기업과 금융기관이 줄줄이 도산하고 실업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외환위기 때 국민의 행복지수가 급락했음을 절감하지 않았던가.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이젠 거의 통하지 않을 만큼 물질적 욕구의 수준이 높아지기도 했다.

경제가 계속 활기를 띠려면 기업들이 투자를 왕성하게 해야 한다. 투자는 ‘씨앗 뿌리기’여서 투자가 없으면 열매도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한국의 제조업 설비투자가 시들해지고 있는 상황이 심상찮다. 기업인들은 대체로 “기업을 이렇게 흔들어 대고 규제 완화도 구호뿐인 데다 정국도 어지러우니 투자할 마음이 생기겠느냐”고 반문한다.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최근 “선거가 있는 내년에 기업들이 경영에만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인으로서 외풍에 오죽 시달렸으면 이런 발언까지 했을까.

선거 때면 후보들이 기업에 손을 벌리고 그들에게 정치자금을 건네준 기업인이 곤욕을 치르는 사례가 되풀이된다. 과거 정경유착 시절에 기업은 정치자금을 준 대가로 사업권을 따내는 등 이권을 챙길 수 있었으나 요즘엔 이런 신규 사업도 별로 없다. 정권으로부터 직접 혜택을 받을 일은 거의 없지만 혹 ‘괘씸죄’로 걸려들면 세무조사, 불공정거래 조사를 당할지 모르므로 ‘기업 안보’ 차원에서 호주머니를 열어야 하는 게 을(乙)의 처지인 기업이다.

삼성, LG, 현대·기아자동차 등 대그룹은 치열한 글로벌 경쟁의 중심에 서 있다. 선진국의 유수한 대기업과 생사(生死)를 걸고 겨루고 있는 것이다. 이들 민간 기업에서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이는 정부가 기업을 도와주기는커녕 투자 의욕을 꺾는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면 곤란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6개월째 파견 근무 중인 재정경제부 김근수 국장은 “한국에선 기업 하는 게 불편하고 정부도 도와주지 않으니까 기업들이 자꾸 외국으로 빠져나가려는 것 같다”면서 “현장을 찾아가 보니 기업인들의 하소연이 엄살이 아니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새해엔 기업들에 활력이 감돌기를 소망한다. 일자리를 만들어 백수 청년들을 고용하고 이익을 많이 내 임금도 올려 주었으면 한다. 설비투자와 연구개발비를 늘려 미래에 대비하면 더욱 좋고…. 기업이 경영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바깥 세력이 발호하지 않기를….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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