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무기 보유 시인설이 외신에 보도된 25일 정부 관계자들은 하루 종일 우왕좌왕했다.
나종일(羅鍾一) 대통령국가안보보좌관은 ‘북한이 핵 보유를 시인한 것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확인 중에 있다. 미국 정부도 (보도 내용을)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통상부 고위관계자도 “어떤 보고도 접수하지 않았다. 그런 내용이 있다면 (3자회담 미국 수석대표인) 제임스 켈리 차관보가 서울에 와서 설명할 것이다”고 말했다.
윤영관(尹永寬) 외교통상부장관은 이날 오후 서울에 온 켈리 차관보를 만났지만 북한의 핵보유 시인 사실을 통보받았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그는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국제협약을 위배한 것으로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상당히 중요한 침해행위가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오히려 궁금증만 더해줬다.
정부 관계자들의 애매한 행태는 우리 정부가 켈리 차관보의 입만 쳐다볼 수밖에 없게 된 딱한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런 와중에 이날 종합주가지수는 21.72포인트(3.69%)나 폭락해 566.63으로 마감했다. 사스 공포에 이어 북핵에 대한 불안감 확산으로 투자심리가 급속도로 위축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부가 말만 앞세우다 ‘북핵 아웃사이더’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북핵 해결을 위한 주도적 역할’을 누차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15일 “(북핵 문제는) 한국도 중요한 당사자지만 핵과 안전보장의 중심적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이라고 말을 바꿨고, 23일에는 “우리의 회담 참여문제는 명분보다는 실리적 결과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핵 문제는 북한의 주장대로 북한과 미국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사안이기 때문에 우리가 북핵 회담에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러나 북한의 핵 보유 시인설을 둘러싼 이날의 소동은 한국이 북핵 문제의 직접 당사자이자 피해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우리가 베이징 회담에 직접 참여했더라면 북한 대표의 핵 보유 발언이 협상용 엄포인지, 사실을 밝힌 것인지도 훨씬 쉽게 간파했을 것이다. 북한대표의 말을 한국어로 직접 듣는 것과 통역을 거쳐 들은 미국 사람들로부터 다시 영어로 전달받는 것은 천지차이다. 언어문제뿐만이 아니다. 제삼자인 미국이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강도로 우리의 주장을 펼쳐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전달해 주는 이해관계에 따라 가감될 수도 있다.
더 늦기 전에 북핵 협상에 직접 참여해 국민의 불안을 덜어줘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김차수 정치부 차장 kimc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