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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넓히기]예술은 사랑과 이해에서 탄생한다

입력 | 2002-03-22 17:40:00


언어들 사이에는 번역하기 어려운 말들이 많다. 우리말의 ‘복’(福)에 해당하는 영어 어휘를 찾기 힘들듯이 영어의 ‘컴패션’(compassion)은 우리말 상응어를 얼른 내놓기 어려운 단어이다. ‘동정’이라 해도 성에 차지 않고 ‘연민’이라 옮겨도 개운치 않다.

맹자의 심성론에 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의미상으로는 가장 가까운 듯 하지만 ‘측은’의 지나친 속화(俗化)가 마음에 걸린다. 컴패션이란 말에는 사랑, 연민, 동정의 뜻말고도 ‘고통의 이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이해하는 데서 솟아나는 사랑, 연민, 동정-이런 뉘앙스를 다 담아낼 우리말을 찾는 일은 그래서 상당히 고통스럽다.

시카고대학 철학교수 마사 너스봄은 ‘시적 정의’(1996)라는 책에서 ‘컴패션을 위한 상상력’ 훈련이 예술교육이라 말한다. 작년에 나온 ‘사유의 반란-정서의 지성’이란 책에서도 너스봄은 타인의 아픔에 대한 이해, 연민, 측은지심으로서의 ‘컴패션을 위한 상상력’ 교육이 “시민정신을 기르게 하는 데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극히 중요한” 훈련이라 강조한다.

너스봄의 이런 주장은 인문학이나 예술 교육이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길러내기 위해서만 필요한 교육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사람의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시민 교육의 불가결한 일부라는 사실을 거듭 일깨운다.

소프라노 조수미의 수필집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제일미디어·1994)는 젊은 나이에 쓰여진 글들인데도 ‘경지’에 이른 예술가를 엿보게 하는 대목들을 많이 담고 있다. “사람을 이해하고 가슴에 품는 것”이 예술이며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는”데서 예술은 출발한다고 그는 쓰고 있다. 공항에서 소설책 읽다가 비행기 놓친 이야기, 소설 읽으며 울던 이야기도 나온다. 어려서 그녀가 가장 즐겨했던 오락이 ‘소공녀’을 읽다가 발견한 ‘셈치고 놀이’였다고 그는 토로한다.

일종의 가정법적 상상의 상황을 설정(“그렇다 셈치고”)해서 놀이를 만드는 것이 ‘셈치고 놀이’이다. 그 놀이의 경험 덕택에 그는 어머니가 와 있을 리 없는 외국 무대에 올랐을 때에도 “맨 앞자리, 어머니가 앉아 있다고 치자… 오늘 공연이 성공하기를 가슴 졸이며 기도하고 있다고 치자”라는 ‘셈치고’의 방법으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한다.

하나님이 인생을 풍요롭게 하라고 보내준 선물들 중의 하나가 바로 ‘셈치고 놀이’라고 조수미는 말한다. 이 ‘셈치고’의 상상력은 너스봄이 말한 ‘컴패션을 위한 상상력’과 다르지 않다. 그 상상력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들 사이의 울타리는 무너진다. 모든 존재물들을 “사람이라 치고” 대화상대로 끌어들이는 순간 예술이 탄생한다. 이것이 ‘의인화’의 신비한 기원이다. 예술의 의인화는 그냥 단순한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대상과의 사이에 ‘너와 나’의 관계를 세우고 처지를 바꾸어 생각할 줄 알게 하는 대화와 이해의 형식이다. 창조적 상상력 교육과 인성교육은 어디 먼 곳에 있지 않다.

도 정 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