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에 활동한 성 프란시스는 종교의 길로 접어들기 전인 젊은 시절에 미남은 아니지만 언제나 즐거움이 넘쳐서 아름답게 보이는 젊은이였다고 알려져 있다.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크고 반짝이는 눈과 커다란 귀를 갖고 있었으며 즐겁게 노는 것을 좋아해서 음유시인의 노래를 부르며 여자들에게 구애를 하고 가톨릭 축제일에는 교회에 가는 대신에 근처 시골길을 산책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프란체스코 디 베르나르도네라는 이름의 이 즐거운 중세의 플레이보이를 성자의 길로 이끈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성 프란시스의 고향인 아시시에서부터 구비오까지 성 프란시스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을 하면서 이것이 내내 궁금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 여행을 떠난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프란시스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그 여행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일들을 경험하곤 했다. 날씨가 갑자기 나빠지기도 했고 강도를 만나기도 했고 병에 걸리기도 했으며 때로는 종교적 환상을 보았다. 심지어 계시를 받은 적도 있었다.
어느날 저녁무렵 프란시스가 아시시 성벽 바로 밑에 있는 조용한 은둔자들의 마을 산 다미아노에 갔을 때도 갑자기 십자가가 빛을 내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시스, 내 집이 무너져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가서 나를 위해 내 집을 수리하라.” 프란시스는 이 말을 무너져가는 교회를 수리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말 한 마리와 비싼 천들을 훔쳐다가 돈을 마련해 산 다미아노의 사제에게 주었다. 그러나 사제는 그의 돈을 거절했다.도둑질이 들통나자 프란시스는 아버지를 피해 아시시 뒤쪽의 수바시오산에 있는 차가운 동굴에 숨어 기도를 했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아시시로 돌아왔을 때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비단과 벨벳으로 된 바지와 망토를 삼베로 된 튜닉과 바꿔 입은 그를 보고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다.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집으로 끌고 가서 사슬로 묶어놓고 매질을 했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성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믿고 아무도 없을 때 그를 풀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아버지에게 잡힌 그는 재판을 받기 위해 아시시의 주교 앞으로 끌려갔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아들과의 절연을 선언했고, 프란시스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 사람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입고 있던 옷과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아버지에게 건네준 후 알몸으로 구비오가 있는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친구와 함께 지낼 작정이었다.
그가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행이었다. 그는 걸으면서 노래하고, 걸으면서 기도했다. 피오포마을을 지난 직후 그는 강도를 만났다. 그러나 그에게는 강도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화가 난 강도들은 눈이 쌓인 도랑 속에 프란시스를 던져넣고 도망쳐버렸다. 프란시스는 노래를 부르며 도랑에서 일어났다.
빈곤한 생활을 끌어안는 행위는 단순히 없으면 없는대로 견디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 프란시스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남에게 베풀면서 사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약하고 병든 몸은 그를 겸손하게 했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기꺼이 환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의 삶이 곧 그의 삶이었기 때문에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들과 삶을 나눌 수 있었다.
성 프란시스가 자신을 이러한 삶으로 이끈 내면의 여행을 하며 걸었던 산길을 따라 아시시에서 구비오로 가는 길에 성 프란시스의 뼈가 묻혀 있는 산 프란체스코 교회에 들렀다. 이 교회는 97년 가을에 일어난 지진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는데 지오토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아직도 망가진채 남아있었다. 이 교회의 지하에 묻혀 있는 성 프란시스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3층짜리 교회의 무게 때문에 아주 갑갑해하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자신이 종교계의 기존 질서에 등을 돌리고 탁 트인 길을 따라 여행을 하면서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환영함으로써 13세기 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미신과 폭력의 무게를 덜어내는 작업을 시작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성 프란시스는 자신의 주위에 모여든 수도사들과 함께 둘씩 짝을 지어 이탈리아 국내는 물론 스페인 프랑스 스위스 등지를 도보로 여행하면서 설교를 하고 기도를 했다. 때로는 수바시오 산에서 명상을 하거나 스폴레토 계곡의 포르지운콜라에 있는 예배당 옆의 작은 오두막에서 함께 살기도 했다.
지칠줄 모르고 걸어다닌 덕분에 성 프란시스의 발바닥은 갈라지고 못이 박혔을 것이다. 그는 육체적인 고통이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그의 끝없는 여행은 인간 조건의 진실, 즉 고통을 향해 그를 이끌었다.
성 프란시스는 라 베르나에서 성흔을 얻었다. 당시 그와 함께 있었던 레오 수도사의 기록에 따르면, 1224년 9월 17일 빛줄기가 성 프란시스의 몸에 쏟아진 후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났던 것과 똑같은 상처가 그의 몸에 나타났다고 한다. 한때 성 프란시스가 묵었던 낡은 성에서 번개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필자는 라 베르나 전체가 빛으로 감싸이는 광경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성 프란시스는 40대 중반 무렵 건강이 악화돼서 더 이상 여행을 많이 하지 못했다. 생애의 마지막 2년 동안 그는 말라리아 영양실조 결핵 류머티즘 등에 시달렸다. 성흔이 있는 자리도 계속해서 콕콕 쑤시고 아팠다.
그가 곧 죽을 것 같다는 소식을 들은 아시시 사람들은 사람을 보내 그를 아시시로 데리고 왔다. 그는 이미 몸이 너무 약해져서 걸을 수도, 말을 탈 수도 없었기 때문에 가마를 타고 성문을 통과했다. 한때 자신을 거부했던 도시를 축복한 뒤 그는 희망에 따라 포르지운콜라의 예배당 바닥에 알몸으로 누워서 최후를 맞았다. 1226년 10월3일의 일이었다.
옛 기록에 따르면 그가 죽는 순간 그의 몸에서 빛이 나고 교회종들이 저절로 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필자:그레텔 얼리치〓천국의 질문(Questions of Heaven)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