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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마이너 리그(57)

입력 | 1998-12-23 19:21:00


화적 (13)

우리가 참석한 공적인 행사도 꽤 많았다. 뻬뜨루 최의 안내로 브라질 항공사 홍보실을 방문했는가 하면 그가 수입해 들여오는 쌍마자동차의 모터쇼에도 초청되었다. 현 교민회장, 그리고 차기 교민회장이 될지도 모르는 중요인사들도 두루 만나보았다. 그때마다 우리 셋은 각기 다른 직함으로 소개되었다. 승주는 기획사의 이사였고 조국은 텔레비전 피디였으며 나는 작가이자 신문기자였다. 뻬뜨루 최가 사업상 필요하다고 미리 양해를 구한 일이었는데 막상 그렇게 불리고 보니 기분이 괜찮았던지 조국은 자기 이름 뒤에 ‘감독님’을 붙이지 않으면 아예 돌아보지도 않았다.

교민신문과의 인터뷰 때 조국은 4천 석짜리 극장 공연에 더해 디너쇼도 열겠다고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공관원과 주재 상사원, 교포 단체장과 연예인을 한 조로 해서 골프대회를 개최할 것이며 또 브라질에 왔으니 축구대회도 빠뜨릴 수 없다고 거품을 물었다. 이 모두가 5만 브라질 교민의 애국심과 2세들의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시키려는 취지라고 말한 뒤 조국은 자신의 두 손을 굳게 맞잡고 높이 흔들어 보였다. 그 손바닥 안에는 ‘4천석, 5만 교민’이라고 적힌 컨닝용 글씨가 땀 때문에 번져 있었다. 그런데도 자기 혼자서 타블로이드판으로 격주간을 만드는 교민신문의 늙은 사장은 조국의 연설에 감동한 눈치였다.

“조국!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오.”

하며 마치 신록 예찬을 하듯 조국을 예찬했다. 조국은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다. 조국의 늠름한 모습은 발전된 조국의 자랑스러운 상징이었다. 그밖의 공식일정으로는 ‘한국의 날’ 선포식 문제로 상파울루 시장을 만나는 일도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취소되었다. 5일간의 빠듯한 일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우리를 배웅하러 공항에 나온 뻬뜨루 최는 몹시 섭섭한 표정이었다. 불편한 게 없었냐는 인사치레에 조국은 브라질에서 영어를 쓰지 않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안 돼 답답했을 뿐 다른 어려움은 없었다며 뻬뜨루 최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테이크 잇 이지!’라고 치하했다. 며칠 사이 조국과 승주는 스스로 거물이 되어 있었다. 뻬뜨루 최에게서 펠레를 섭외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므로 나 역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조국과 승주는 벌써부터 브라질이 그리워진다고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갈 수 있다면 마누라라도 팔겠다는 조국에게 승주는 ‘마누라를 사기라도 하겠다’고 한층 비장하게 대꾸했다. 뻬뜨루 최의 ‘헌팅작전’은 ‘약발’이 셌다. 그때부터 둘은 이 일에 한사코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조국과 승주는 연예인 섭외에 들어갔다. 그들의 눈앞에는 브라질의 자연과 그 자연의 일부인 여자들의 모습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때 세상의 다른 곳에서는 대선이 주요 관심사였다. 연예인들도 선거 유세에 동원되고 있었다. 그 중에는 금일봉을 바라거나 사돈의 팔촌의 친구이거나 혹은 진짜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야심을 품은 사람도 있었다. 브라질 교민회장이 반드시 초청해주기를 원하는 가수는 그 마지막 경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