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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에 총격요청」파문]국민회의, 대선5일전 정보입수

입력 | 1998-10-01 19:57:00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해 ‘적과의 동침’까지 서슴지 않은 판문점 총격요청사건이 국민회의 내부에 인지된 것은 대선 닷새 전인 지난해 12월13일이었다. 제보 접수 뒤 국민회의는 북풍방어 총력전에 돌입했고 막전막후에서 안기부 한나라당 등과 치열한 줄다리기를 벌였다.

○…제보를 접수한 뒤 당시 김대중(金大中)후보 선거캠프는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제보 내용은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후보측이 4·11총선 때의 판문점 무력 시위와 비슷한 사태를 일으키려 한다. D데이는 선거 이틀전인 12월16일이다’였다. 또 공작 가담자 중 한 사람이 J그룹 고문인 한성기(韓成基)씨라는 내용까지 제보에 포함됐다는 후문이다.

김후보 선거캠프는 즉각 북풍공작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하고 다양한 대책마련에 착수했다. 우선 15일 ‘옥수수박사’ 김순권(金順權)교수를 통해 “북한이 남한의 선거에 개입해선 절대로 안된다”는 내용의 대북 경고성 메시지를 보냈다. 또 16일에는 “이회창후보가 북한과의 거래에 나선 것은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한 위험한 불장난”이라고 공세를 취했다.

16일에는 국민회의 천용택(千容宅)의원과 권영해(權寧海)안기부장간에 담판이 벌어졌다. 당시 천의원은 “판문점에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 만일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김후보의 당락과 관계없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고 경고했다. 국민회의는 안기부 기무사 및 군내의 모든 정보인맥을 총동원해 판문점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우려했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김후보의 측근들은 당시 “뾰족한 대책도 없는 상황에서 후보에게 보고해봐야 마음만 흔들린다”며 제보내용을 보고하지 않았다가 당선 3일 후인 21일에야 보고했다는 후문이다.

○…판문점 총격 요청사건의 핵심인물로 알려진 오정은(吳靜恩)전청와대행정관은 청와대 내부의 사임압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리를 유지하려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 수사를 맡았던 안기부측은 오래전에 오씨의 총격요청사건 개입혐의를 잡고 청와대측에 사표를 수리토록 요청했다. 하지만 안기부는 보안상의 이유로 오씨의 구체적인 혐의내용을 청와대측에 통보하지 않았다. 오씨는 자신에 대한 수사망이 좁혀오자 “사표를 낼 수 없다”며 적극적인 구명 운동까지 벌였으나 6월 안기부측이 청와대 고위인사에게 물증을 제시하며 오씨의 사표수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설득해 사표가 수리됐다는 후문이다.

오씨는 이번 총격요청사건 외에도 96년 4·11총선때 박지원(朴智元)청와대공보수석에 대한 흑색선전물 살포에도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박수석은 청와대 입성 직후 오씨를 불러 “모든 것을 용서할테니 사실대로 얘기해보라”며 “K, K, L씨의 지시로 흑색선전물을 만들어 뿌리지 않았느냐”고 확인했으나 오씨는 부인했다는 것.

○…안기부와 검찰은 총격요청 사건을 수사하면서 수사기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수사관련자 전원에게 ‘보안 특명’을 내리고 극비리에 수사를 진행. 서울지검 공안1부는 9월25일 안기부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직후부터 공안1부가 있는 서울지검 청사 9층 출입자들을 일일이 체크하며 보안에 신경을 썼다. 검사들에게 기자 접촉 금지령을 내렸으며 수사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같은 부의 검사들에게도 수사 사실을 숨겼다.

안기부도 9월9일과 17일 오정은 장석중(張錫重)씨를 구속하면서 구속영장 사본을 공개하지 않았다. 또 구속영장의 범죄 사실에도 이 사건의 핵심인 ‘총격요청’사실은 빼고 대북 접촉을 통한 개인적인 이권도모 내용만 담았다.

〈이수형·윤영찬기자〉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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