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윤정모가 연애소설을 썼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들의 이야기라 제목도 ‘그들의 오후’(창작과 비평사). 일본군위안부 기지촌여성으로 대를 이어 질곡의 역사를 걸머져야 했던 한국여자들의 삶(‘고삐’)을 고발할 때나 끝내 조국땅을 밟지 못한 채 눈감은 작곡가 윤이상의 일대기(‘나비의 꿈’)를 그릴 때의 격정과는 또 다른 빛깔이다.
‘그들의 오후’에는 열부(烈婦)가 아닌 열부(烈夫)가 있다. 첫사랑 여자의 고시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버스행상과 엑스트라 배우, 공사장 인부를 전전하며 쌀을 벌어오는 남자 민기환. 여자를 위해 남자는 ‘작가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만 성공한 여자는 남자를 버리고 떠난다. 20여년 후 여자가 장관으로 출세의 정점에 올랐다가 ‘북쪽에 살아있는 아버지가 당 고위간부’라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해임되는 몰락을 겪은 뒤에도 첫사랑 남자는 변함없이 여자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여자는 길들지않는 고양이처럼 잠시 남자곁을 머물다 떠나고 만다.
작가는 중년 남녀의 사랑 이야기 속에 통념을 뒤집는 여러차원의 ‘역할뒤집기’를 시도했다. 남자에게 온갖 궁상스러운 살림을 떠맡겨 놓고 자신은 오직 성공을 위해 줄달음치는 여자 주인공 서연. 그러나 남자는 원망은커녕 여자가 자신이 날품을 팔아 사온 고등어를 맛있게 발라먹는 모습을 보며 사랑을 확인한다.
성욕에 대한 남녀차이도 통념과는 사뭇 다르게 그려진다. 첫사랑을 잃은 민기환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선택한 교사 아내는 남편이 실업자인 것은 참지만 잠자리를 거부하는 것은 견디지 못하고 외도를 저지른다. 이런 통념뒤집기는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 과연 현실적인가, ‘사랑의 온전한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가능케 한다.
여자주인공 서연의 실각과정은 상당부분 과거 한 여성장관을 모델로 했다. 작가는 장관조차 여자다워야 동정표를 얻을 수 있는 성차별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만큼은 ‘사회성’보다는 ‘남자의 순애보’가 독자를 더 매혹시킬 법하다.
“작품을 쓰기 전에 실연의 충격으로 다리를 절게된 한 남자를 실제로 만난 일이 있다. 여자가 떠나버리자 분출되지 못한 사랑의 에너지가 자신의 몸을 용암처럼 흘러다니며 심장 대신 뼈와 연골을 녹인다는 사람을….”
〈정은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