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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한상진/「역사의 종언」과 「문명의 충돌」

입력 | 1997-11-22 08:10:00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것은 1989년 여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곧 동유럽의 변혁이 뒤따랐고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완승에 환호했다. 서구의 승리로 이념 대립의 긴 역사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역사의 종언은 21세기를 보는 서구의 낙관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계급 지역 국가간의 불평등이나 갈등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후쿠야마는 여기서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적 타당성을 주장한다. 우리가 부닥치는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다 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 외의 다른 어떤 대안도 규범적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진보적 지식인의 딜레마는 여기서 명백해진다. 시장경제는 분명 수많은 부작용을 가져온다. 그러나 누가 과연 사회주의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시장경제의 모순이 심각하다 하더라도 시장경제의 틀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이념의 타당성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성이 확립되었다는 후쿠야마의 주장은 개운치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힘을 갖는다. 그러나 후쿠야마의 눈은 편협하다. 이념대립에 초점을 맞추어 세계사를 해독할 뿐 포괄적인 문화의 지형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경쟁과 변화를 놓치고 있다. 어쩌면 그가 외치는 자유주의의 승리는 서유럽중심주의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될 것이다. 그의 역사종언론은 역설적으로 비판의식의 실종과 함께 동양의 「타자화」를 수반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을 후쿠야마에 대한 반론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는 89년 가을 역사의 종언을 비판한 글을 발표했으며 이를 93년 문명충돌론으로 발전시켰다. 헌팅턴은 이념갈등이 사라진 자리에 문화와 전통, 정체성의 문제가 세계사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보았다. 민족 인종 종족 남녀 소수집단의 문제들을 포함하여 서양문명 동양문명 이슬람문명 간의 새로운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헌팅턴의 시각은 후쿠야마보다 현실적이다. 그는 서구가 내건 보편주의, 예컨대 자유주의 개인주의 인권 자유시장 등에 대한 비서서구의 왕성한 도전이 있음을 인정했고 다원주의의 시각을 채택했으며 모든 도전의 뿌리에는 문화와 정체성, 즉 삶의 의미를 둘러싼 투쟁이 있음을 간파했다. 즉 그는 서구의 경제 정치 군사적 패권만이 아니라 문화적 패권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헌팅턴의 약점은 치명적이다. 문명간의 충돌이 왜 불가피한가를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문명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지적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고 충돌이 불가피해지는가.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공존하는 모델도 가능하지 않은가. 이에 대한 깊은 사색 없이 문명충돌을 기정사실화하는 그의 논의는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피상적이다. 더 나아가 헌팅턴은 동서간의 이념갈등이 소진한 상황에서 서구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새로운 갈등전선을 찾는 냉전적 사고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문화를 대화가 아닌 대립의 관점에서 본 그의 사고방식은 인문학의 토양을 파괴시킬 뿐아니라 동양을 지배하려는 서양의 뿌리 깊은 편견을 그대로 반영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적 시각을 동양의 「탈식민화」에 연결시켜 나름대로 활용하는 지식인이 꽤 있다는 점이다.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거론되는 반서구 담론이 그것이다. 한 보기로 싱가포르의 전총리 리콴유(李光耀)는 서양 문화제국주의에 도전하는 몸짓을 보인다. 동양은 과학 기술 산업발전 등에 관하여 「근대화」는 필요하지만 서양과 문화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서양의 인권이나 민주주의 제도는 동양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동서양의 대립을 전제한 단순한 구조의 「탈식민화」가 우리에게 바람직한 것인가. 필자는 회의적이다. 문화의 차이는 물론 중요하다. 경제적 성장이나 정치적 민주화에 더하여 동도서기(東道西器)의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도 옳다. 문제는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민족이나 인종, 남녀간의 대화의 문을 어떻게 활짝 여는가에 있다. 참된 탈식민화는 단순한 분리나 배척이 아니라 차이를 존중하는 「강제 없는 중복합의」에 있지 않을까 한다. 현대의 사상가로서 하버마스나 테일러, 롤즈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만일 우리가 동서양을 대립시키는 자세로 전통문화를 복원하려 한다면 정치적 보수주의와 함께 전통의 이름으로 전통을 합리화하는 근본주의의 부작용에 시달릴 것이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론이나 헌팅턴의 냉전적 문명충돌론을 넘어서는 보다 여유있고 자신감있는 동아시아의 관점은 경제성장만이 아니라 문화의 중요성에 눈을 떠 서구의 합리주의와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단순한 대립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오리엔탈리즘의 거울상일 뿐이다. 한상진(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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