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기다, 경제를 살리자 하는 말들이 그동안 신문 지상에 자주 등장했지만 평소 경제에 관심이 없던 나에겐 그저 따분한 기사거리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남편 회사가 부도를 내면서 남의 일로만 여겨지던 것들이 내 앞에 성큼 다가왔다. 남편은 30대그룹 안에 드는 진로그룹에 다니는 샐러리맨이다. 그래서 평소 중소기업에 다니는 친구 남편들에 비해 든든하게 생각해왔다. 부도로 쓰러지는 것은 언제나 중소기업이었기 때문에 남편 회사의 부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부도유예협약이니, 화의(和議)니 하는 듣도 보도 못했던 생소한 용어들이 내앞에 나타났다. 갑자기 시댁과 친정 식구들, 친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별로 친하지도 않던 옆집 아줌마까지 걱정을 하며 관심을 보였다. 처음엔 남편이 『상관 안한다』 『말단사원이라 감원대상에서 제외됐다』고 하기에 나도 태연한 척 했다. 그러나 남편 회사에서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자 마냥 태평스럽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집마련을 위해 월급은 몽땅 저축하고 보너스를 두 달로 쪼개서 생활하던 그저 평범한 말단 사원의 아내인 내게 여유자금이 있을 리 없었다. 당장 필요한 공과금,4세된 아들의 학원비 등 생활비가 다급한 문제로 다가왔다. 친정이나 시댁에 손을 내밀기도 어려워 그동안 사용을 꺼리던 카드에 의존했다. 물론 적금과 주택부금 내는 건 중단됐다. 가을에 전셋집을 조금 넓혀 이사가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그러나 돈 문제는 둘째였다. 회사 부도 이후 남편의 귀가시간은 점점 늦어지기 시작했다. 비상이라고 야근하기 일쑤였고 곤드레만드레가 돼 집에 와서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짜증을 내는 일도 늘었다. 얼마전 1백만원 가까이 하는 어린이 영어 교재를 마련했다는 친구의 자랑에 갑자기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큰 돈은 벌어다주지 못할 망정 월급은 꼬박꼬박 갖다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앞섰다. 자연스럽게 친구들과의 연락이 끊어졌다. 집안 사정을 자꾸 물어보는데 똑같은 대답을 하기도 뭣하고 궁색한 모습을 보이기도 싫었다. 희망찼던 미래가 점점 뿌옇게 느껴졌다. 가만히 넋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부업으로 이모가 운영하는 식당의 카운터에서 일하게 됐다.내가 일하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남편은 아침도 거른 채 내가 일어나기 전에 출근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에서 살림만 하던 내게 식당일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하루종일 서 있어 다리가 붓고 온몸이 아팠다. 청소를 못해 집안이 엉망인 것은 물론이고 아이는 아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힘들었다. 졸지에 아이를 맡게되신 시어머님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어느날 학원 선생님으로부터 평소 명랑하던 아이가 침울해졌고 기가 푹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어느날 밤 식당 문단속을 하고 나오다가 강도에게 주먹으로 맞고 그날 매상이 든 돈가방마저 뺏긴 일까지 당했다. 이러다가 우리 가족마저 부도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남편과 상의 끝에 원래대로 돌아가기로 했다. 저축은 나중에 사정이 좋아지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우리 가족이 부도나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아이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남편도 직장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또 회사 사정이 다소 나아져 월급이 늦기는 해도 꼬박꼬박 나왔다. 4월부터 일어난 짧은 기간의 일들이지만 몇십년이 되는 듯 세상이 달라보였다. 주변의 이목을 생각하며 늘 불평만 했던 나는 샐러리맨의 아픔을 헤아릴 줄 알게 됐다. 식구들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힘들어했을 남편의 어깨를 감싸며 말하고 싶다. 『여보, 우리 가족은 부도가 안났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