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수첩이나 마음속에는 그동안 여러 이름들이 부침을 거듭해 왔다. 예컨대 신의를 저버린 사람들의 이름은 붉은색으로 지워왔고 은혜로운 사람들의 이름은 푸른색으로 새겨 넣어왔다. 그런데 최근 붉은색으로 지웠다가 푸른색으로 되살린 이름이 있다. 며칠전 전화가 걸려와 받으니 뜻밖에도 이미 지워버린 이름의 친구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되살아나는 분노와 행여나 하는 기대감이 교차하며 상대방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나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했다면서 당장 만나자고 했다. 낮도깨비에 홀린양 한동안 멍했고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들며 수년전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5년전 어느날 사업하는 친한 친구가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했다. 은행에서 8천만원을 대출받는 것이었다. 십년지기였기에 두말없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몇달 뒤 느닷없이 집달관들이 계엄군처럼 우리집에 들이닥치더니 차압딱지를 붙였다. 친구가 부도를 내고 외국으로 도피해버렸기 때문이다. 집은 곧 경매처분될 것이라 했다. 어떻게 마련한 집인데 경매라니…. 십수년간 싸구려 셋방을 떠돌며 절약해 모은 돈으로 마련한 유일한 보금자리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모습에 넋을 잃었다. 아내는 아예 머리를 싸맨 채 몸져 누워버렸고 나는 직장에 출근해서도 일손을 놓은 채 줄담배만 피워 물었다. 처자식을 데리고 길바닥에 나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15년간 근무한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직금으로 서울을 벗어나 고양시에 손바닥만한 연립주택을 얻어 생활하며 시나브로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직장을 얻기 위해 3개월여를 허송하며 이사람 저사람에게 비대발괄한 사연은 또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세월은 무정했어도 그 친구만큼은 무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음날 만난 그 친구는 백배사죄한 다음 그동안 미국에서 돈을 좀 벌어왔다며 이자까지 쳐서 피해보상을 하겠다고 했다. 뜻하지 않은 그의 말을 듣고 나는 크게 선심(?)을 썼다. 『좋다. 갚겠다면 받겠다. 하지만 이자는 그만두고 원금만 다오』 우리는 그날밤 늦도록 어깨동무하고 3차까지 술집을 순례한 다음 노래방에 가서는 쌓였던 분노와 회포를 속시원히 풀어버렸다. 금전은 유한해도 우정은 무한함을 마음깊이 느끼면서…. 정영주(경기 고양시 관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