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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정세현/김일성 사후 3년

입력 | 1997-07-07 20:05:00


김일성 사망후 3년동안 남북간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조문시비로 남북당국간 접촉과 대화가 끊긴 가운데 94년 10월 北―美(북―미)간에 「제네바 기본합의」가 체결되자 정부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을 자초했다는 비난이 거세게 일었다. 이에 정부는 핵문제로 잠시 묶어 두었던 남북경협을 풀어주었다. 95년에는 쌀 15만t도 지원했다. 그런데 쌀지원이 또 시비거리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인공기사건 청진항사건이 터지자 「쌀주고 뺨맞았다」는 비난과 함께 대북강경론이 득세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북정책의 일관성 부족을 공격하고 나섰다. 그런가 하면 작년 가을에는 잠수함사건이 터지는 등 실로 엎치락뒤치락했던 것이 지난 3년동안 남북관계의 겉모습이었다. ▼경제 팽개친 「체제 단속」▼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남북관계가 퇴보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94년까지 1억9천만달러 정도였던 남북 교역량이 95∼96년에는 2억9천만달러 수준으로 껑충 뛰었고 북한은 매년 1억5천만∼1억6천만달러의 무역흑자를 보았다. 남쪽이 해마다 중국산 옥수수 1백만t을 살 수 있는 돈을 현금으로 조용히 북에 넘겨준 셈이다. 94년 가을 인천∼남포 항로가 처음 열린 후 부산∼나진 항로도 열려 작년말까지 총 7백26회 이상의 남북해로왕래가 있었다. 지금도 물자와 장비와 인원이 남북해로를 월 7, 8회 이상 왕래하고 있다. 이것이 지난 3년동안 남북관계의 속내였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남북협력의 물줄기는 마르지 않고 졸졸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걱정거리는 북한의 식량문제를 비롯한 경제난이다. 북한의 식량문제는 몇 해 동안 식량 몇십만t을 지원해주고 끝낼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난 것 같다. 수재도 당했지만 비료와 농약부족 때문에 수확량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 식량난으로 체력이 떨어지니 노동의욕이 날리 만무하다. 유훈통치(遺訓統治)나 「고난의 행군정신」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렵고 농업구조 자체를 개혁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북한 식량문제의 본질이다. ▼「유훈」대로 대화나서야▼ 식량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구조적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다. 전달된 식량이 에너지와 차량부족으로 비에 젖어 상했다니 머지않아 기름 석탄 자동차까지 보내자는 주장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에너지난으로 공장 가동률이 30%미만으로 떨어지니 주민들이 써야할 물건도 부족한 상태다. 북한붕괴론이 날로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바로 북한내부의 이런 사정 때문이다. 북한이 오늘날 이 지경에 처하게 된 근본원인은 김일성 사후 북한지도부가 체제단속차원에서 경제보다 정치우선주의에 매달리면서 스스로 문을 걸어닫았기 때문이다. 특히 조문문제를 빙자해 남한당국과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배수진을 친 것이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남북경협확대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남쪽과의 대화를 끊고 미국만 상대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이제 김일성의 만3년상은 끝났지만 북한지도부는 김이 생전에 경제문제로 마지막까지 고심했고 남북정상회담을 수락한 것도 경제난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붕괴의 낭떠러지에서 벗어나려면 「유훈」을 받들어 남북대화와 개혁 개방의 길로 나와야 할 것이다. 정세현(민족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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