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長燁(황장엽)씨가 67일 동안 먼길을 돌아 드라마같은 여정을 끝내고 그가 원하던 한국에 왔다. 황씨의 서울 안착(安着)은 그러나 안도감과 함께 적지 않은 우려도 낳고 있다. 그의 입국이 정치적 갈등을 몰고 올지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이다. 그동안 시중에는 여권이 황씨카드로 한보사태 등을 희석시키려 할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어 왔다. 야당은 야당대로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고심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과거 공안정국에 시달린 경험 때문이다. 본란이 이미 지적했듯이 어느 누구도 황씨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 황씨는 어느 정권, 어느 정파의 전리품이 될 수 없다. 황씨가 털어놓을 북한정보는 국민 모두의 공유물로 한반도 평화정착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만일 여권이 황씨 망명을 정권적 차원에서 이용하려 한다면 이는 국민을 오도하고 기만하는 것이다. 특히 그의 정보를 멋대로 해석해서 북에 대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거나 민심의 향방을 조작하려 할 경우 민족적 범죄행위로까지 지탄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의 공식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황장엽 리스트」는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섣불리 뇌관을 건드렸다가는 「매카시즘 선풍」에 온나라가 혼란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황씨는 북한 주체사상의 창시자이자 북한권력의 핵심에 있던 사람이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으로 망명한 어떤 북한 고위층 인사보다 정확한 고급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그에 대한 조사가 끝나는대로 극비에 속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정보를 바로 공개해야 한다. 각종 루머와 엇갈린 정보 때문에 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국민들은 북의 정확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전해줄 정보에 목말라 있다. 빠른 시일내에 공개 기자회견 등을 통해 국민에게 그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황씨는 서울에 도착한 후 인사말을 통해 『북한이 전쟁준비에 몰두하고 있다』며 앞으로 『마지막 힘을 바쳐 평화통일에 기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민족 앞에 큰 죄를 졌기 때문에 속죄하고자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북경 한국대사관 영사부에 머무는 동안에도 자술서를 통해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하고 싶어 북을 떠나 남으로 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황씨를 일단 환영하는 것은 그의 망명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기여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기대 때문이다. 황씨의 망명을 영웅시하며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성급히 북한 붕괴를 예단해서도 안된다. 더욱이 북에 대한 남한체제의 승리감에 도취돼서는 안된다. 황씨 망명의 정확한 동기부터 파악하고 그가 갖고 있는 북한 정보와 식견을 선용하는 일이 중요하다. 황씨의 신변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감성 아닌 냉철한 이성으로 그를 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