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초 해외 무장독립운동 주요 거점 중의 한 곳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았다. 33인 민족대표로는 유일하게 연해주 지역을 방문한 한용운(사진)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는 19세기 중반부터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었고 독립투사들이 활동한 곳이다.
1905년 봄, 한용운이 해삼위(海參외)로도 불린 이곳을 찾았을 때는 러일전쟁의 포성이 한창이어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했다. 이런 분위기가 이곳 동포들이 만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조선 동포들은 머리를 빡빡 깎아 일본인처럼 보이는 한용운을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첩자로 오인했다. 심지어 한용운을 죽이려는 위협도 가해졌다.(고재석, ‘한용운과 그의 시대’)
경위는 이랬다. 첩자로 지목된 한용운은 죽기를 각오하고 해삼위 교민대표 엄인섭을 찾아가 다짜고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대범함에 놀란 엄인섭은 자신의 명함을 주며 통행증으로 쓰라면서 귀국할 것을 권고했다. 한용운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는 부동항을 구경하려고 바닷가에 나왔다가 그만 조선인 청년들에게 붙들렸다. 엄인섭의 명함도 통하지 않았다. 바다에 수장당하기 직전 러시아 경관들에게 간신히 구조됐다. 한용운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방성대곡을 했다.(‘한용운 전집’)
올해 초 한용운의 러시아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 ‘만해로드 대장정’ 탐방단을 이끌고 연해주를 찾은 동국대 고재석 교수(만해연구소 소장)는 “만해가 연해주행에 관해 쓴 글을 읽어보면 해삼위에서 국내외를 연계한 독립운동 가능성을 타진한 것 같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만해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기는 쪽에 희망을 걸고 일제에 대항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기자는 한용운이 수장될 뻔한 바닷가 금각만(金角灣)을 찾아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동포들로부터 버림받은 그의 참담함을 헤아려 보았다.
1909년 10월 26일, 한용운은 안중근이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한 의거를 듣고 엄인섭과 블라디보스토크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한용운에게 명함을 건네준 엄인섭이 바로 1907년 안중근과 결의형제를 하고 의병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한용운은 시로 안중근을 ‘만 석의 뜨거운 피와 열 말의 담력을 지닌’ 인물로 묘사하면서 그의 의거를 기렸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없다지만, 만일 엄인섭이 자신의 외삼촌이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인 최재형(1858∼1920)과 한용운을 만나게 했다면 역사가 달리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당시 해삼위 최고의 부호였던 최재형은 자신의 전 재산과 목숨을 독립운동에 내놓았던 애국지사였고, 안중근의 의거를 위한 일체 자금을 댄 인물이다. 그런 최재형이 안중근 못지않게 투사 성향이 강한 한용운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을 게다.
그러나 역사의 시계는 한용운보다 뒤늦게 해삼위를 찾은 안중근에게 해외에서의 ‘대업’을 부여했다. 여비도 다 떨어진 한용운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크라스키노 등을 지나 두만강을 건너 걸어서 국내로 돌아온 후 3·1만세운동의 주역이자 48인 민족대표로 ‘꺼지지 않는’ 민족의 등불이 됐다. 고 교수는 “안중근의 단지동맹비가 있는 크라스키노에 만해의 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안영배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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