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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항일 민족정신 일깨웠다

Posted February. 28, 2007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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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식 계몽서였던 춘향전

1912년 이해조가 옥중화를 펴낸 것을 비롯해서 당시 지식인들은 춘향의 절개를 민족의식과 연관시켜 1935년까지 무려 27가지의 춘향전을 내놨다. 이는 다른 어떤 문학작품보다도 많은 것.

설 교수는 소설가 김기진에 따르면 일제시대 춘향전은 매년 1만 부 이상 팔리는 최대 베스트셀러였다며 최남선 이광수 김영랑 등 당대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던 춘향전 안에 항일정신, 민족정신을 담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일제시대 초기 민족주의자였던 육당 최남선이 1913년 펴낸 고본춘향전 서문은 백두산에서 시작해 전국의 명산과 절을 거친 뒤 논개의 혼이 어린 촉석루를 지나 남원으로 가는 기행문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설 교수는 춘향을 논개와 비유하며 한반도 산천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장치라며 훗날 변절해 친일 노선을 택한 최남선이지만 창작 당시에는 중국식 지명과 인명을 한국식으로 바꾸는 등 민족 주체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지적했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했던 시인 김영랑은 1940년 문장에 발표한 시 춘향을 통해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는 옛날 성학사 박팽년이 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었었니라며 지조와 역사의식을 강조했다.

춘향의 정조는 그 시대의 부패한 권력과 싸워 나가는 의지라고 말했던 유치진은 희곡 춘향전을 통해 식민지 시대의 민족의 고통을 풍자하며, 민족 주체성의 회복을 형상화했다.

춘향사당에 담긴 숨은 뜻

1931년 전북 남원 광한루 동편에 세워진 춘향사당도 지식인들이 춘향을 통해 민족의식을 전파하려 했던 대표적인 예.

31절 12주년인 1931년 3월 1일 완성된 춘향 사당 정면에는 거북의 등을 타고 붉은 해를 뒤로한 채 용궁을 빠져나오는 토끼 모양의 조형물이 조각돼 있다.

설 교수는 일본을 상징하는 해를 뒤로하고 바다를 탈출하는 토끼는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날을 염원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 사당은 남원의 지식인과 기생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으고 진주성의 논개사당을 본 떠 세운 것. 이들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 숲 가운데 사당을 세우고 사당 대문에 태극 문양과 함께 일편단심을 줄여서 단심()이라는 붉은색 글씨를 새겼다.

이번 연구에서 설 교수는 국내 최초의 비교문학적 국문학 연구인 조선소설사를 1933년 펴낸 김태준이 춘향 사당 건립에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남원 지역을 수차례 답사한 김태준이 신간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이현순 등 지역 유지들과 접촉한 뒤 춘향 사당 건립에도 참여했다는 것.

언론도 민족의식 북돋기위해 힘써

지식인들의 이런 움직임에 주목한 동아일보는 1925년 춘향전은 심청전과 아울러 조선국민문학의 대표를 이룬 것이라며 당시 돈으로 1000원의 상금을 내걸고 춘향전의 개작을 모집해 수십 명이 응모했다.

하지만 9월 24일자에 불행히 국민문학으로 추천할 만한 것이 없어 응모하신 여러분께는 심히 미안한 일이나 춘원 이광수 씨에게 청하여 춘향전을 쓰기로 했다고 발표했고 이에 따라 이광수는 1925년 9월 30일부터 1926년 1월 3일까지 일설 춘향전 96회를 본보에 연재했다.

설 교수는 김태준도 조선소설사에 이어 1935년 1월 신년호부터 8일까지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논문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는 등 당대 지식인들은 언론을 통하여 춘향전에 나타난 민족의식을 북돋기 위해 힘썼다고 밝혔다.



장원재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