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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사관의 주변 부조화

Posted January. 25, 2014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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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왕조는 외교란 걸 몰랐다. 변방 오랑캐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하사품을 주는 형식의 조공을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된통 당하고 국제무대로 끌려나와 근대적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서구 열강들과 하나씩 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1882년 조선과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란 걸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영사 격인 진수당이 처음 파견됐다. 그가 머물기 위한 공관을 지은 곳이 오늘날 서울 명동의 중국대사관 자리다.

청 말에 실권자가 된 원세개는 조선에서 정치적 입지를 닦았다. 약관의 원세개는 1884년 갑신정변 때 청나라 군대를 끌고 와, 김옥균이 일본을 업고 일으킨 정변을 진압하고 진수당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그를 당시 서울의 서양 외교관들은 총독이라고 불렀다. 원세개는 진수당이 지은 공관을 헐고 건물을 새로 지어 10년간 머물렀다. 그곳을 지키는 청나라 병사의 횡포가 어찌나 심한지 앞길에는 낮에도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았다.

중국대사관이 새로 지어져 그제 개관식을 했다. 그 자체로는 축하할 일이다. 대사관은 업무동 숙소동 등 두 동으로 이루어졌는데 업무동은 10층, 숙소동은 24층이다. 주변에 나지막한 상가들만 밀집해 있어 이 고층의 건물은 매우 위압적으로 보인다. 외국 공관이라 도시 계획상의 건축 규제를 받지 않았다. 또 현대식 고층 건물의 꼭대기에 중국 전통식 기와 형태의 지붕을 얹어놓아 보기에 따라서는 부조화스러운 느낌을 준다.

프랑스 파리의 중국대사관은 옛 전통 석조건물에 입주해 있다. 영국 런던의 중국대사관은 영국 특유의 벽돌 건물 양식의 외관을 갖고 있다. 독일 베를린의 중국대사관은 본에서 베를린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신축됐지만 베를린의 전형적인 건물이다. 일본 도쿄의 중국대사관도 평범한 일본 관공서 모양이다. 미국 워싱턴의 중국대사관은 노출 콘크리트 건물 양식이어서 세련된 느낌을 준다. 한국의 중국대사관은 층고()와 외관이 위압적이어서 구한말 원세개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송 평 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