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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직접 하고 버스로 출퇴근하는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

요리 직접 하고 버스로 출퇴근하는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

Posted March. 15, 2013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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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아버지. 겸손과 청빈의 대명사.

기도와 고행을 통한 삶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온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불린다. 가난한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몸으로 직접 복음을 실천해 온 성직자라는 평을 듣는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장에 오른 뒤에도 관저가 아닌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자동차나 운전기사도 두지 않고 사제복을 입은 채 버스와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한다. 요리도 자신이 먹는 것은 직접 요리해 먹는다.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제는 빈민촌에서 주로 일하는 사제들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한다. 교황청 방문을 위해 바티칸에 와도 로마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한다. 그는 평소 신도들에게 로마의 교황청을 방문하기보다 그 돈으로 빈자들에게 기부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19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철도노동자 아버지에게서 5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1958년 예수회에 입문해 수도사의 길을 걸었다. 산미겔 산호세대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나 1970년대 후반까지 지방을 돌며 사목 활동을 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교황에 선출된 후 첫 발코니 연설에서 자신을 교황이 아닌 주교로 부른 것처럼 앞으로도 낮은 삶을 사는 동시에 로마 주교로서 다른 주교들과 동등한 자세로 임하겠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는 2005년 콘클라베(교황 선출 회의)에서는 4번의 투표에서 전임 교황으로 선출된 베네딕토 16세(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에 이어 줄곧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번 콘클라베를 앞두고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아직 건강하지만 나이가 76세로 많고 10대에 감염증으로 폐 한쪽을 잘라내 전 세계를 다녀야 하는 교황의 격무를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등도 작용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이번에 고령과 건강 등을 이유로 자진 사퇴한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은 선출될 때 78세였다.

이번에 추기경단이 젊고 왕성한 인물이 아니라 교황 프란치스코를 예상보다 빨리 5차례 투표 만에 선출한 것은 왜일까. 이는 비리와 추문으로 얼룩진 교황청 안팎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절제와 금욕, 복음 등 가톨릭의 핵심 가치에 가장 충실해 명망이 높은 사람을 뽑은 것도 한 이유라고 AP 통신은 전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교회의 기본 정신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초창기 교회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충실하게 사는 것만이 바른 해법이라는 주장을 펼쳐 왔다. 따라서 앞으로 교황청의 조직이나 운영도 복음 전파를 최우선으로 하여 그에 맞춰 쇄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그는 다른 교황 후보자들과 달리 교황청에서 고위직을 맡은 적이 없어 교황청의 아웃사이더에 가깝다. 따라서 전 세계 12억 가톨릭 신도를 관할하면서 화려하고 방대해진 교황청 조직과 행정을 개혁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순수 성직자로서는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는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으며 교회의 대중화를 이끈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의 조국 아르헨티나가 군부 독재 치하에서 민주화와 인권이 탄압받는 상황에서 예수회를 이끌면서 비()정치화를 견지하라는 지침을 내려 결과적으로 가톨릭교회가 군사 정권과 손잡고 독재에 눈을 감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계의 지지가 없었다면 군사정권이 그처럼 마음대로 독재를 휘두를 수는 없었다고 프란치스코의 전기 작가는 말했다. 아르헨티나가 전체 인구의 70%가 가톨릭이면서도 성당에 나가는 사람은 10%에 불과한 것은 이 같은 굴절된 과거 역사가 한 요인으로 꼽힌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교구의 책임자로서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독재정권으로부터 박해받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상황에서 비겁하게 외면했다는 비난도 제기된다고 외신은 전한다. 그는 자신 개인이나 아르헨티나의 가톨릭에 제기되는 이 같은 비판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1970년대 라틴 아메리카에서 독재에 저항해 일어난 좌파 성향의 해방신학에 거리를 둬 진보적인 교회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종훈 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