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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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사실 자동차는 오래전부터 애물단지가 된 상태였다. 타고 다니는 시간보다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부모님을 병원에 모시고 다니느라 꼭 필요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세금과 유지비는 계속 나가는데 고작해야 한 달에 몇 번 시동을 거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동차를 쉽사리 정리하지 못했다. 오히려 새 차를 사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10년이 다 된 차는 한눈에도 성한 데가 별로 없었다. 여기저기 흠집이 많았고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면 차부터 신경 쓰였다. 차가 내 이미지를 깎아내릴까 봐 멀찌감치 세워 두고 한참을 걸어간 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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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김 선생님이 생각났다. 선생님은 몇 달 전부터 내가 새로 나가는 모임의 멤버였다. 60대 중반으로 대기업 재무 업무를 하다 퇴직하고, 지금은 집 근처에서 작은 부동산을 운영하고 계셨다. 김 선생님이 특별하게 느껴진 건 두 번째 만남 때였다. 그날 회원들이 모두 모이자 선생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커피 주문 받겠습니다.” 순간 다들 놀라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나도 커피가 마시고 싶었지만 혼자 먹기 눈치 보여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기에 선뜻 나서기도 쉽지 않았다. 선생님께서도 다르지 않으셨을 텐데 주저하지 않고 손을 드셨다.
선생님이 계산하신 커피 한 잔은 적잖은 역할을 했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금세 풀렸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이후로는 돌아가며 간식을 준비하는 문화도 생겼다. 누군가는 집에서 쿠키를 만들어 왔고, 또 다른 이는 손수 커피를 내려 왔다. 선생님의 작은 배려 하나가 모임 전체를 편안한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그런 걸 보면 사람 사이의 거리는 대단한 무언가로 좁혀지는 게 아니었다.
한참 뒤 김 선생님께 우스갯소리로 여쭸다. “사업 잘되시나 봐요.” 선생님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으셨다. “그거랑은 전혀 상관없어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퇴직 후 가장 먼저 줄어드는 건 돈이 아니라 사람이더라고. 그래서 사람과 관련된 일에는 돈을 무조건 아끼지만은 않게 됐다고. “저는 술값은 못 냅니다. 커피값만 낼 수 있어요.” 농담처럼 던지신 말이었지만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
김 선생님을 떠올려 보니 내가 갈피를 잡지 못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선생님은 돈 씀씀이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계셨다. 불필요한 지출은 한 푼도 아까워하셨지만, 써야 할 곳에는 망설임이 없으셨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분야를 배우고, 삶의 반경을 넓히는 일들이 그랬다. 선생님에게 돈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지켜가는 수단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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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내게 김 선생님의 모습은 확실한 이정표가 됐다. 타인의 이목에 얽매여 껍데기를 유지하려던 나와는 달리, 선생님의 시선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향해 있었다. 남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고민하지 않으니 돈 앞에서도 위축되거나 흔들릴 필요가 없었다. 선생님이 유독 인상 깊었던 이유는 형편이 좋아 보여서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 단단해 보였기 때문이다.
퇴직한 많은 이들이 얇아지는 지갑을 걱정한다. 하지만 정작 두려워해야 할 점은 ‘무엇을 위해 돈을 쓸 것인가’에 대한 나만의 기준이 없다는 사실이 아닐까. 명확한 잣대 없이 돈을 사용하면 체면과 주변의 평가에 끌려다니기 쉽다. 그렇게 쓰는 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끊임없는 갈증만 불러올 뿐, 결코 불안감을 잠재울 수 없다.
어쩌면 김 선생님은 아셨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퇴직이란 직장을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나를 움직여 왔던 타인의 시선과도 결별해야 하는 것임을. 퇴직 후 삶의 행복과 여유는 확고한 나의 기준을 세우는 데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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