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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던 사람은 지나쳐 가고, 남은 건 걸음뿐… 삶은 어디에 있는가[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6-06-14 23:09:00

〈119〉 삶은 다른 곳에 있다




A를 찾아 길을 떠난 K의 여정을 15개의 액자 속 그림으로 담은 안규철 작가의 ‘삶은 다른 곳에’. 소농지 촬영(서울시립미술관 제공)·김영민 교수 제공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삶은 다른 곳에’는 체코 출신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고, 한국의 예술가 안규철의 작품 이름이기도 하다. 서울 노원구 서울시립 북서울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글짓, 쓰는 예술’ 전시에선 총 15개의 액자로 이루어진 안규철 작가의 ‘삶은 다른 곳에’를 볼 수 있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니, 어쩌면 이 작품은 삶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지도 모른다.

첫 번째 액자에는 A를 만나러 길을 떠나는 K가 서 있다. 나머지 액자들은 K의 여정이 어떠했는지를 차곡차곡 보여준다. 길을 떠난 K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걷고 있는 A를 발견한다. 이토록 무난하게 A를 발견하다니, K의 여정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인공에게는 문제가 닥치는 법. K가 큰 소리로 불렀는데도 A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 버린다. K가 서두르는 만큼 A도 서두르기에 두 사람의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어쩌면 좋지. 이러다가 A를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마지막 액자에 이르면 빌보드 간판에 새겨진 ‘LIFE IS ELSEWHERE’(삶은 다른 곳에)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작품은 우리가 삶이라고 믿는 욕망과 추구의 과정이 과연 삶의 전부인지를 되묻게 한다. 소농지 촬영(서울시립미술관 제공)·김영민 교수 제공

그러나 이것이 웬일인가. 갑자기 A가 돌아서서 K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반가운 나머지 K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A에게 손을 흔든다. 예상외의 사태가 발생한다. A가 K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멀어져가는 A의 모습을 보며 K는 생각한다. A가 아니었을 거라고, A라면 자신을 못 알아볼 리 없다고. 과연 그럴까. K가 A를 만나고 싶어한들, A도 K를 만나고 싶어할 거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우리의 연애는 실패해왔다. 결국 A 혹은 A라고 여겼던 이는 저 멀리 사라져간다. 그래도 K는 계속 걷는다. K는 자기가 길을 떠난 이유를 기억하지 못할 때까지 걷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마지막 15번째 액자에 이른다. K 앞에 다음과 같이 적힌 거대한 빌보드 간판이 나타난다. “LIFE IS ELSEWHERE”(삶은 다른 곳에) 이것이 결론이다.

이것이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K의 여정을 삶의 여정이라고 간주하고 단계별로 살펴보자. 1단계는 초심(初心)의 단계다. 그는 A를 만나겠다는 분명한 초심 혹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많은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데 K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뿐인가. 그는 인생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까지 한다. 즉, K는 실행력이 있는 인간인 것이다. 2단계는 그 인생의 목적을 마침내 달성하려 분투하는 단계다. K는 운이 좋다. 자신이 찾고자 했던 A를 발견하는 행운을 누릴 정도로 운이 좋다. 그러나 K는 A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다. 목적이 있다고 한들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인생은 그런 것이다.

3단계에서는 A가 K에게 다가오는 반전이 일어난다. 이것 역시 이상하지 않다. 인생에는 불운만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이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대상이 거꾸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행운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런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의 연애는 성공해왔다. 진짜 아이러니는 4단계에서 온다. 다가온 A가 K를 그냥 지나쳐 가버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K가 예상치 못했던 사태다. K는 자신이 A를 만나고 싶어하는 만큼 A도 자신을 만나고자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신을 찾지만, 신도 인간을 찾으리란 법은 없다. 신은 가혹할 정도로 인간에게 냉담할 수 있다.

A가 K를 그냥 지나쳐 가버린 이후, K의 인생에는 지향점이 없다. 그냥 걸을 뿐이다. 하루하루 소일하는 게 삶의 전부인 양, 태어나서 죽는 게 인생의 전부라는 듯, 그저 걷는다. 자신이 애초에 다짐했던 인생의 목적 같은 것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왜 사는 것일까’라는 질문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가 벼락처럼 마지막 단계가 온다. 눈앞에 거대한 빌보드 간판이 나타나서 말한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고.

마지막에 등장한 거대한 빌보드 간판은 K에게 삶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알려주지 않는다. 삶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해 줄 뿐, 삶이 어디 있는지 적시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라고. 태어났으니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인생이 다른 곳에 있다니, 어쩌라고. 거대한 빌보드 간판은 어떤 안내도 해주지 않지만, 아주 무용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삶은 이곳에 있지 않다는 것만큼은 알려주니까. 삶이 어디 있는지 알려면,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이곳에서 계속 헤매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곳”이란? K의 관점에서 볼 때 “이곳”은 15개의 액자로 이루어진 세계다. 그곳은 바로 누군가 초심을 가지고 욕망하고, 그 욕망을 따르고, 그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배반당하고, 정처 없이 걷다가 결국 삶은 이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며 끝나는 세계다. 15개의 액자가 보여주는 바, 욕망의 발생에서 소진에 이르는 과정 내부에는 삶이 없다. 아니, 욕망을 좇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그 과정 안에 인생이 없다니, 인생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인생은 15개의 액자로 이루어진 세계의 외부에 있다. 그 세계의 내부에 머무는 한 사람은 당장의 자극에 반응하고, 욕망을 일으키고, 그 욕망을 충족하러 동분서주하느라 경황이 없다. 그 과정은 너무 정신없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음미할 수 없다. 그러니 삶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삶은 그 정신없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떨어져 그 과정을 바라보는 순간에 있다. 그렇게 바라보고 음미할 때 비로소 삶은 손에 쥘 수 있는 어떤 것이 된다. 책이나 예술은 그렇게 삶을 바라보고 음미할 수 있게 해주는 창문이다. 그러니 삶은 욕망이 들끓는 “여기”에 있지 않고, 예술이나 책을 향유하는 “저기”에 있겠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는 말했다. 진정한 삶은 삶의 외부에 있다고.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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