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위험한 착각 〈하〉 챗봇 활용, 자동화만으론 융합 아냐 AI-전문 영역 서로의 사고체계 섞여 새것 탄생해야 진정한 융합 이뤄져 “내 일의 본질은” 전문가에 묻게 해 궁극적 종착역은 AI-네이티브 환경 융합 텃밭에서 새 직업도 탄생할 것
광고 로드중
맹성현 태재대 부총장·KAIST 명예교수
광고 로드중
《인공지능 전환(AX)은 조직과 개인의 체계를 인공지능(AI) 환경에 맞춰 바꾸는 일이지만, 본질은 전문 영역과 AI의 융합에 있다. ‘AI 융합’이라는 말이 대학 학과명이나 기업 조직도, 신문 헤드라인에 넘쳐난다. 하지만 대개는 특정 도메인(영역)에 AI를 적용하고 응용한다는 정도로 소비되고 만다.》
진정한 융합은 한 영역의 본질과 다른 영역의 본질이 만나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깊은 과정이다. 요리에 비유해 보자. 한 냄비에 고기와 채소, 양념을 담아 섞는다고 자동적으로 맛있는 전골이 되지는 않는다. 재료들이 한 솥에서 함께 끓다가 열과 시간 속에서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어느 하나의 재료만으로는 낼 수 없는 감칠맛이 생겨나야 비로소 요리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의 ‘AI 융합’은 재료를 한 그릇에 담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기업에서 AI 챗봇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은 융합이 아니라 글쓰기와 기획을 AI에 맡기는 일이다. ‘AI 영화’를 만드는 창의적 작업도 마찬가지다. 인간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가지고 AI에 그저 동영상 생성을 맡기는 식이라면 AI를 도구로 사용해 작업의 일부를 위탁하는 표층적 융합일 뿐 본질적 융합이 아니다.
광고 로드중
둘째, 본질적 융합은 전문가의 정체성에 균열을 일으킨다. 도메인 전문가에게 “내가 평생 해온 일의 본질이 무엇이었나”를 다시 묻게 만드는 것이다. 교사에게 가르침의 본질을, 예술가에게 창작의 본질을, 변호사에게 변론의 본질을 다시 묻는 일이다. 그동안 쌓아온 전통적 지식과 방법론을 해체하고 AI의 사고를 폭넓게 받아들여야 비로소 창조적 결과가 나온다. 이 실존적 부담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융합의 필요성에는 동의하면서도 실천적으로는 회피한다.
셋째, 변이의 속도가 다르다. AI 신기술은 분기 단위로 모습을 바꾸지만, 각 도메인은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문명적 자산이다. 그 자산을 장시간 체화해 온 전문가일수록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빠른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다. 긴 호흡으로 살아온 전문가가 AI 신기술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두 시간대의 충돌이 만만치 않다.
여기에 가치론적 충돌이 더해진다. 효율과 존엄, 성취와 인격, 이윤과 책임 사이의 긴장 말이다. AI는 효율을 극대화하지만, 교육·예술·사법·의료 등의 본질은 효율만이 전부가 아니다. 예컨대 AI가 학생의 긴 작문을 1초 만에 채점하고 등급을 매긴다고 해서 그것을 곧 ‘좋은 교육’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융합을 시도하는 순간 우리는 이 가치들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AI 융합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무엇보다 AI와 해당 도메인의 본질을 동시에 깊이 이해해야 한다. 두 분야를 그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롭게 사유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둘째, ‘번역자’를 길러야 한다. AI나 도메인 한쪽 전문가가 아닌, 양쪽 언어를 구사하며 매개하는 제3의 인재형이다. 최고AI책임자(CAIO·Chief AI Officer)의 역할도 여기에 있다. 셋째, 융합을 과정으로 봐야 한다. 한 번에 끝내는 일이 아니라 AI와 도메인의 경계를 끊임없이 재협상하는 지속적 작업이라는 얘기다.
광고 로드중
융합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세는 두 가지 차원으로 정리할 수 있다. 현실적 차원에서 지금 한국의 AI 정책, 기업 전략, 대학 교육은 여전히 표층적 융합에 머물러 있다. 본질적 융합으로 가는 길은 멀고 더디지만, 우회로는 없다. 철학적 차원에서 보자. 융합이라는 말 안에는 AI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가 포함돼야 한다. AI와 공존하는 일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 일이기 때문이다.
AI가 몰고 오는 위험을 응시하면서 AI라는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길은 단 하나다. 인간성과 기술을 본질의 차원에서 융합하는 것이다. AI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결국 인간을 다시 발견하는 길로 이어진다. 그 융합의 텃밭에서 새로운 영역이 개척되고, 새로운 직업이 탄생할 것이다.
맹성현 태재대 부총장·KAIST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