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앞두고 가족간 호칭 문제 재조명 “도련님-아가씨 불러야…내가 노비냐” 여성 90% 이상 “호칭 바꿔야” 불만 옛 세대는 “뭐가 문제냐” 공감 못 해 전문가 “사회적 논의해 볼 필요 있어”
기사 참고용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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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비도 아니고 ‘도련님’ 호칭을 왜 써야하는지 모르겠어요.”
민족 최대 명절인 설을 앞두고 여성 커뮤니티에서 ‘호칭’ 문제가 다시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제사상은 간소화되며 점점 변하는데, 성차별적 호칭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불만이다.
● “초등학생한테 ‘도련님’ 하려니 자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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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에선 “명절 음식을 만들면서 ‘도련님 오셨어요’라고 말하면 ‘종년’이 된 기분이다” “결혼 후 집안 행사에서 초등학생인 남편의 사촌동생들을 만났을 때 ‘도련님’ ‘아가씨’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얘들아’라고 했더니, 시고모라는 사람이 우리 집안은 근본이 있다는 둥 펄쩍 뛰면서 한 소리하는데 황당하더라. 자괴감이 들었다” 등 사례가 잇달아 올라왔다. 남녀 평등이 당연한 지금의 2030 세대는 이 호칭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많다.
결혼 3년차인 김모 씨(34)는 동갑내기 남편보다 7살 어린 여동생에게 매번 ‘아가씨’라고 부르며 존대한다. 그는 “시가에 갈 때마다 ‘아가씨 왔어요’ ‘잘 지냈어요’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너무 큰 스트레스”라며 “내가 이 집에 팔려온 것도 아닌데 한참 어린 동생에게 편하게 말조차 못 하는 현실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남편은 내 동생들한테 ‘님’ 자 없이 처남·처제라고 하거나 이름을 부르며 자연스럽게 반말을 할 수 있지만 나는 시부모 눈치 때문에 말을 놓기조차 어렵다”고 토로했다.
시동생이 최근 결혼했다는 이모 씨(36)는 “이제는 도련님이 아닌 ‘서방님’으로 불러야 한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보통 시동생이 미혼일 때는 ‘도련님’, 기혼이 되면 ‘서방님’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서방님’의 어원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으나 ‘글 공부하는 방’을 뜻하는 ‘서방(書房)’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널리 알려져 있다. ‘글방에 있는 님’이라는 의미로 남편 외에도 결혼한 시동생, 시누이의 배우자 등을 모두 ‘서방님’으로 부른다는 것. 하지만 ‘서방님’이라는 호칭이 남편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더 강하게 인식되면서 시동생 등을 부르는 말로 쓰이는 데 거부감을 느낀다는 목소리가 많다. 이 씨도 “시동생과 대화할 땐 아예 호칭을 생략한 채 말을 꺼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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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간 호칭 문제에 대한 누리꾼들 반응. X
여성들의 문제 제기는 수치로도 이미 확인됐다. 2018년 국민권익위원회 등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도련님·아가씨 등의 호칭을 계속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여성의 93.6%가 ‘바꿔야 한다’고 답한 바 있다. 여성들이 호칭에 대한 불만이 상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에 국립국어권과 여성가족부(현 성평등가족부)는 호칭 개선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2020년 국립국어원은 ‘우리, 뭐라고 부를까요’를 발간해 남편 동생을 ‘ㅇㅇ(자녀 이름) 삼촌·고모’로 불러도 되고 상대 이름이나 ‘~ 씨’로 부를 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옛날 방식에 익숙한 어른들의 반감, 관행 등 때문에 새로운 표현이 정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의견도 나온다.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호칭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권력이 있어야 하는데 가족 내에서 며느리의 서열은 여전히 가장 낮다”며 “특히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며느리들은 (호칭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대체할 호칭도 마땅치 않다는 지적이다.
신 교수는 “한국어 환경에서 가족 간 이름을 부른다는 게 쉽지 않고 ‘~ 씨’ 역시 낮춰 부른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며 “결국 부르지 않거나 부르는 일을 줄이기 위해 만남을 피하는 문제들이 생기게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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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문제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은 “왜 바꾸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옛날부터 써오던 말인데 감정 없이 부르면 되지 않나” “도련님·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뭐가 어렵다는 건지 이해되질 않는다”고 말한다. 굳어진 호칭을 ‘굳이’ 바꿀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X(엑스·옛 트위터)에서는 “이게 예민한 거라면 난 쓸데없는 일에 예민한 사람이 되겠다” “호칭이 별게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바뀌어도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니냐” “별거 아닌 일로 난리라고 하면서 별거 아닌 걸 바꾸려고 하면 난리다” 등의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신 교수는 “언어는 개인이 바꿔야 하지만 개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사회적 약속이니까 사회가 바꿔줘야 편안하게 언어가 변하는 것”이라며 “(이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소수이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가족의 문제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논의하고 문제 의식을 계속 공유할 수 있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혜선 기자 hs87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