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날엔 화학을 터뜨린다/장홍제 지음/304쪽·2만 원·휴머니스트
조선은 화약으로 시작해 화약으로 끝난 나라였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장군으로 인기를 얻은 건 고려 말 피해가 극심했던 해적을 물리치면서부터였다. 진포해전을 비롯해 고려가 해적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은 계기는 최무선이 화약을 개발하면서부터였다. 이후 태종에서 세종 시기 동안 조선이 안정화돼 500년 역사를 이어 갔던 것도 따지고 보면 많은 양의 화약과 훌륭한 화포를 충분히 생산해 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조선 태종 무렵 이미 1만3500개의 화포를 마련해 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 시대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자면 놀라운 숫자다. 태종 시대면 유럽에서는 잔다르크가 프랑스 기사들을 이끌고 백년전쟁에서 싸우던 무렵 아닌가. 같은 시각으로 보자면 조선의 멸망 역시 유럽에서 개발된 다이너마이트, 무연화약 같은 신식 화약을 조선은 대량 생산할 수 없었다는 기술적 한계와 맞닿아 있다는 이야기도 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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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화약을 만드는 기술은 로켓과 우주 기술의 기초가 되기도 하며, 돌을 깨뜨리는 발파 작업에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광산 개발이나 토목 공사 역시 화약 기술이 발달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 터널을 뚫을 때도 지하의 바위를 정교하게 화약으로 터뜨려 부수는 기술이 여전히 자주 사용된다. 지하철을 매일 타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우주에 떠 있는 인공위성을 사용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최무선의 후예들이 한국에서 기술을 잘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장홍제 광운대 교수는 과학, 그중에서도 화학을 대중에게 친숙하게 소개하는 데 근래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신간 ‘답답한 날엔 화학을 터뜨린다’는 불을 지르는 목적으로 처음 개발된 무기에서 최신 화약까지 다양한 폭발물에 얽힌 이야기들을 시대순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쉽게도 한국의 화약 이야기와 최무선에 관한 내용이 대폭 생략돼 있기는 하다. 그 대신 그만큼 일관성 있게 화약과 연결된 역사와 문명의 변화를 잘 설명하고 있다. 화학자의 실험실에서 탄생한 한 줌의 가루가 어떻게 세계사의 판도를 뒤집었는지 극적으로 보여 주는 책이다.
동시에 폭발과 화약에 관한 화학 지식을 충실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뛰어나다. 진지한 이야기를 장엄하게 이어 나가다가도, 문득문득 장 교수 특유의 절묘한 웃음이 서려 있는 대목 또한 책이 지닌 매력을 몇 배쯤 키워 주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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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숭실사이버대 환경안전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