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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가난한 농촌 소년이 노벨상을 타기까지

입력 | 2026-01-17 01:40:00

노벨 문학상 받은 中 작가 모옌
실패-굴욕에도 쓰러지지 않고
깊숙하게 뿌리내리며 버텨와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는다/모옌 지음·허유영 옮김/344쪽·1만9800원·필로틱




어릴 적 들판에 풀을 베러 가던 길, 검은 기둥 같은 바람이 굉음과 함께 밀려왔다. 함께 수레를 밀던 할아버지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말했다. “바람이다. 수레를 힘껏 끌어라.” 수레에 실린 풀의 절반은 허공으로 흩날렸지만, 할아버지는 끝까지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수레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지만, 반 발짝도 뒤로 밀리지 않았다.

2012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중국 작가 모옌의 어린 시절 일화다. 그는 이 장면을 떠올리며 강풍에 맞서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미동도 없이 버티는 게 아니라, 몸을 맡겨 흔들리되 뿌리는 놓지 않는 것. 이 경험은 훗날 그의 문학과 삶을 관통하는 ‘버티는 삶’의 뼈대가 된다.

본명이 관모예(管謨業)인 그의 ‘모옌(莫言)’이란 필명은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설적인 이 이름은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소년의 녹록지 않은 어린 시절에서 비롯됐다. 그는 문화대혁명 광풍 속에서 학업을 중단하고 들판으로 나가 소를 몰아야 했다. 말이 많던 아들에게 어머니는 “얘야, 말 좀 그만할 수 없겠니?”라고 했고, 소년은 침묵을 선택한다. 그러나 말하기 좋아하는 천성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고, 그 침묵은 문학으로 발화했다.

이 책은 화려한 명성 뒤에 가려진 모옌의 인간적인 얼굴을 담았다. 춘제를 앞두고 통통한 만두를 기다리던 기억, 옆 동네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넓은 습지를 건너던 일, 거위 한 마리를 훔쳐보겠다고 가슴을 졸이던 일화 같은 소소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거창한 영웅 서사는 없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고 물 흐르듯 읽힌다.

누군가는 ‘불행하다’고 말할 법한 어린 시절은 모옌에게 삶의 태도를 다듬는 시간이 됐다. 콩깻묵 한 덩이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마을 곡식창고 관리원 앞에서 개처럼 짖었던 어느 날, 이를 본 할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낸다. “산해진미든 풀뿌리든 나무껍질이든 배 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어쩌자고 콩깻묵 한 덩이 얻겠다고 개 흉내를 내느냐? 사람은 줏대가 있어야 한다!” 그때 모옌은 “산해진미와 나무껍질은 결코 같지 않다”고 속으로 반박했지만, 할아버지 말에 흐르던 인간의 존엄과 기개만큼은 분명히 느꼈다고 회상한다.

굴욕과 실패, 후회와 외로움이 어떻게 문학이 됐는지를 차분히 보여주는 책이다. 모옌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 삶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수없이 쓰러졌고, 그때마다 더 깊어진 뿌리로 돌아왔다. “강풍에 맞서는 비결은 끝까지 버티는 강직함이 아니라, 흔들리되 자신의 뿌리를 놓지 않는 태도”라고 설파한다.

담백한 흙냄새가 배어 있는 그의 문장을 보면, 모옌의 시선은 언제나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삶의 굴곡을 진솔하게 그리는 동안 유머를 잃지 않는 점 또한 미덕이다. 세계적인 문학 거장의 성공담보다는 오늘도 강풍 앞에서 흔들리는 평범한 삶에게 건네는 조용한 위로처럼 여겨진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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